## 서리꽃 필 무렵
**1. 얼어붙은 시간의 파편**
한밤의 남산은 숨조차 쉬지 않는 거대한 짐승 같았다. 서울의 번잡한 심장부에서도 벗어난, 폐쇄된 천문대 입구에 늘어선 경찰차들의 붉고 푸른 조명이 묵직한 어둠을 갈라놓고 있었다. 희미하게 떠오른 겨울 달빛 아래, 차가운 공기는 살을 에는 칼날 같았고, 서진은 익숙하게 그 한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형사반장 김우진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해답 없는 난감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서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문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직업, 프로파일러 한서진에게 있어 새벽의 출동은 일상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불길한 예감을 동반했다.
내부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오래된 망원경의 뼈대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깨진 유리창 너머로 회색 도시의 야경이 스산하게 펼쳐졌다. 중앙에는 폴리스 라인으로 둘러싸인 작은 원형 공간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 시신이 놓여 있었다.
“피해자는 스물일곱, 박수아. 작년까지 이 근처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다고 합니다. 실종 신고는 없었고요. 발견은 오늘 새벽 두 시경, 우연히 드론 띄우던 아마추어 작가한테…” 우진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서진의 시선은 이미 시신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여자는 마치 한겨울 새벽녘에 피어난 서리꽃처럼, 얼어붙은 채로 앉아 있었다. 온몸에 난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투명했고, 입술은 옅은 자주색으로 굳어 있었다. 보통의 저체온사라기엔, 그 얼굴에 드리운 평온함이 기이했다. 고통도, 공포도 없이 그저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장 그녀의 이목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여인의 눈이었다. 짙고 깊은 밤하늘의 색을 담고 있던 눈동자는 생명력을 잃고 마치 오래된 유리구슬처럼 빛이 바래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 안쪽, 아주 희미하게, 마치 작은 얼음 결정처럼 반짝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사인은 아직 불분명합니다. 외상은 전혀 없고, 독극물 반응도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몸 안의 장기들이… 거의 동사한 상태라고 합니다만, 주변 온도는 영하 5도 정도였습니다. 시신만 유독 내부부터 얼어붙은 듯한 상태예요.” 국과수 직원이 덧붙였다.
서진은 장갑 낀 손으로 바닥에 무릎을 짚었다. 시신 주변, 바닥의 먼지 틈새에서 희미한 검은 가루들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덜어내자, 마치 부서진 숯처럼 바스러지는 가루였다. 코끝으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녀의 질문에 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냄새요? 글쎄요, 퀴퀴한 먼지 냄새나 오래된 쇠 냄새 말고는…”
서진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후각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예민했다. 평소 같으면 시신에서 풍기는 미세한 혈향이나 시취, 혹은 주변의 특정 물질에서 나는 냄새를 잡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신에서는, 이 검은 가루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텅 비어버린’ 냄새였다. 존재감이 증발해버린 것 같은 무(無)의 냄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폐쇄된 공간. 인기척 없는 곳. 외부인의 침입 흔적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떻게 이곳까지 왔으며, 누가 그녀의 생명을 이토록 잔혹하게 ‘말려 죽였을까’?
사건 현장을 떠나기 전, 서진은 한 번 더 피해자의 눈을 응시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영원히 닫혀버린 창문 같은 눈. 그 깊은 곳에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기이한 흥분과 함께, 섬뜩한 어둠을 느꼈다.
***
다음날 아침, 서진은 피해자 박수아의 행적을 쫓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지막 발자취는 의외의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종로의 한 골목, 고층 빌딩 숲 사이에 홀로 박힌 듯한 오래된 한옥 건물이었다. ‘어스름’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곳은 낡은 나무 간판과 삐걱이는 문, 그리고 안개가 낀 듯 희미한 유리창으로 이뤄진 고풍스러운 골동품 가게였다.
가게 문을 열자 낡은 나무와 희귀한 향내가 뒤섞인 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명이 어두웠고, 온갖 종류의 골동품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흙으로 빚은 토기부터 빛바랜 비단 두루마리, 이국적인 문양이 새겨진 칼집까지. 마치 시간이 멈춘 공간 같았다.
“어서 오세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서진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가게 안쪽, 희미한 등불 아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류은율. 가게 주인이라고 했다. 나이는 서른을 갓 넘겼을까, 정갈하게 빗어 넘긴 흑발과 단정한 한복 차림이 고풍스러운 가게와 기묘하게 어울렸다. 그의 이목구비는 그림처럼 완벽했고, 특히 그의 눈은, 깊고 투명한 검은색이었다. 서진은 그 눈을 보는 순간, 어젯밤 시신의 눈에서 느꼈던 희미한 이질감을 다시금 떠올렸다. 하지만 은율의 눈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지, 그 빛이 너무나 고요하고 깊어서 마치 밤하늘을 담아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경찰입니다. 어제… 박수아 씨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서진의 말에 은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고요하게 서진을 응시했다.
“박수아 씨라면, 일주일 전쯤 가게를 찾았던 손님을 말씀하시는군요.”
“네. 혹시 그분이 여기서 무엇을 찾았는지, 아니면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하십니까?”
은율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분은 이곳에서 오래된 은 펜던트를 하나 사 가셨습니다. 작은 매듭 장식이 달린 것이었지요. 특별히 다른 누구를 만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직접 응대했으니까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침착하고 안정적이어서, 어떤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서진의 예민한 감각은 그의 평온함 속에서 미세한 균열을 감지했다. 그의 눈동자는 깊었지만, 순간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는 듯한 찰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는 향기… 희미한 서리 내린 숲 속의 향이었다.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생소한 향. 어젯밤 시신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무(無)의 냄새’와는 달랐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펜던트요? 어떤 모양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십니까?” 서진이 물었다.
“작은 원형이었고, 표면에 오래된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닳아서 자세히 알아보기 힘들었지요. 매듭 장식은… 꽤 복잡한 형태였습니다. 제가 직접 골라 드린 것이라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의 설명은 완벽했다. 하지만 서진은 본능적으로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느꼈다. 단서를 찾기 위해 그녀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은율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왔지만,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서진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진열대 구석, 먼지가 뽀얗게 앉은 작은 서랍장 위에 놓인 낡은 사진첩이었다. 무심코 집어 들어 펼치자, 그 안에는 흑백사진들이 가득했다. 오래된 풍경화 같은 사진들 사이에서, 서진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박수아. 피해자 박수아였다. 젊은 시절의 모습이었지만 분명 그녀였다. 그녀는 어떤 남자의 옆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류은율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모습이었지만, 분명 은율이었다. 그는 박수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은율이 방금 설명했던 것과 똑같은 매듭 장식의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사진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했고, 둘의 표정은 사랑에 빠진 연인의 그것이었다.
사진을 본 서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은율은 박수아를 ‘일주일 전 가게를 찾은 손님’이라고 했지만, 사진 속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손님과 주인을 넘어섰다. 어쩌면 훨씬 오래된 인연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은율의 모습은 사진 속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었다. 마치 시간이 그에게만 비껴간 것처럼.
서진은 사진첩을 다시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시선이 은율에게 향했다. 그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가웠다.
“류은율 씨… 박수아 씨와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서진의 질문에 은율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깊은 어둠을 머금는 듯했다. 그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공기가 순간적으로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저… 아주 오래된, 손님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했지만, 어딘가 섬뜩한 냉기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진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어젯밤 시신 주변에서 발견되었던 ‘냄새 없는 검은 가루’, 그리고 시신만 유독 내부부터 얼어붙어 있던 기이한 현상… 은율의 눈에서 어른거렸던 차가운 빛.
그는 어둠 속에 서 있었고, 그의 눈은 깊은 밤하늘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서진의 심장은, 그 밤하늘의 깊이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거대한 미스터리이자, 너무나 위험한 유혹이었다.
그날 밤, 서진은 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어스름’ 골동품 가게의 사진을 보며 잠 못 이루었다. 사진 속 은율의 눈동자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깊고, 알 수 없는 빛을 머금은 채 그녀를 응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검색창에 몇 글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_냉기. 시신. 상형문자. 밤의 아이들._
엔터 키를 누르자, 화면에는 오래된 전설과 금지된 존재들에 대한 희미한 기록들이 떠올랐다. 그 순간, 서진은 알 수 없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이 살인 사건은 단순한 인간의 범죄가 아니었다. 그리고 류은율은…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뒤흔들, 종족을 뛰어넘는 위험하고도 금지된 사랑의 서막. 그리고 그 끝에 도사린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