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불씨**
해가 뜨기 전의 제국 수도, 카이런은 거대한 회색 그림자였다. 웅장한 황궁의 첨탑은 아직 여명에 닿지 못하고 밤의 장막에 싸여 있었지만, 궁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귀족들의 저택과 상인들의 거리는 이미 활기찬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은 그러나 도시 전체를 비추지 못했다. 오히려 깊은 골목과 빽빽한 빈민가의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 뿐이었다.
류진은 새벽녘부터 짐을 짊어지고 골목길을 누비고 있었다. 등에는 갓 제본된 서적들이 가득한 나무 상자가, 허리춤에는 낡은 배달 명부가 흔들렸다. 그의 직업은 보잘것없는 심부름꾼,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인 ‘글’을 다루지만 정작 자신은 그 정보를 소비할 여유도, 권리도 없는 존재였다. 류진은 황금빛으로 번들거리는 대리석 건물들과 그 앞에 늘어선 고고한 귀족들의 마차를 지나칠 때마다 무심한 듯 시선을 던졌지만, 그의 속에서는 늘 차가운 불씨가 타올랐다.
“이봐, 류진! 거기 섰어!”
뒷골목 어귀에서 쉰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낡은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 ‘칠성’이었다. 칠성은 류진이 어릴 적부터 그에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내어주던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의 얼굴엔 늘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오늘은 유독 창백했다.
“칠성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이 시간에 여기는…”
류진의 말끝이 흐려졌다. 칠성의 눈동자는 공포로 일렁였고, 그의 손가락은 저편의 좁은 골목 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는 낯선 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모두 류진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한결같이 충격과 경악이 서려 있었다.
류진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걸음을 재촉했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싸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는 듯한 웅성거림과 함께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자, 류진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 골목의 터줏대감이자 마을의 어른으로 통하던 ‘매화 할머니’였다. 매화 할머니는 낡은 작업복을 입은 채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반쯤 뜨여 있었고, 핏기 없는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붉은 천 조각이 짓눌린 듯 박혀 있었고, 그 주변으로 검붉은 피가 흥건했다.
“할머니…!”
류진의 입에서 절규와도 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매화 할머니는 비록 류진의 친혈육은 아니었지만, 이 척박한 도시에서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와 작은 빵 조각을 건네주었던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다.
“누가…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한 청년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덩치 큰 제국 병사들의 등장과 함께 가라앉았다. 황금빛 견장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거만하게 사람들을 헤치며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 지긋지긋한 빈민가의 시체쯤은 익숙하다는 듯한 냉소가 떠올랐다.
“무슨 소란인가! 길을 비켜라!”
선두에 선 병사가 긴 창으로 바닥을 쿵 찍으며 소리쳤다. 군중은 쭈뼛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병사들은 매화 할머니의 시체를 대충 살폈다. 아니, 살핀다기보다는 그저 힐끗 보는 정도였다.
“음… 노쇠한 몸으로 밤중에 나섰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모양이군. 목덜미의 상처는 날카로운 파편에 찔린 것으로 보인다. 사고사다.”
병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사고사라니요! 매화 할머니는 한겨울에도 넘어지는 법이 없으셨어요! 누군가 죽인 게 분명합니다!”
류진의 곁에 서 있던 칠성이 용기를 내어 외쳤다. 그러나 병사들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닥쳐라, 노인네! 감히 제국 병사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냐?!”
병사 하나가 칠성에게 다가가 창끝으로 그의 어깨를 툭 밀쳤다. 칠성은 휘청거렸고, 류진은 그의 팔을 잡아주며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곳은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살인 사건이 난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귀찮게 만들지 마라.”
병사 우두머리가 냉정하게 덧붙였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살인 사건으로 처리되면 조사를 해야 하고, 그들의 명성에 흠집이 나며, 복잡해진다. 그러니 사고사로 덮는 것이 가장 쉬운 해결책이었다.
류진은 바닥에 쓰러진 매화 할머니의 시신을 다시 바라봤다. 그녀의 목덜미에 박힌 붉은 천 조각. 자세히 보니 그것은 흔한 낡은 천이 아니었다. 매듭이 꼼꼼하게 지어져 있었고, 그 재질은 매화 할머니가 평생 입어본 적 없는 고급 비단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천 조각 위에는 작은 금실로 수놓인 문양이 희미하게 보였다. 류진은 그 문양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서였을까?
“시신은 빈민가 공동 묘지로 옮겨라. 그리고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은 모두 잡아 가둬.”
병사 우두머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매화 할머니의 시신을 거칠게 들쳐 멨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류진은 분노와 함께 무력감에 휩싸였다. 제국은 이렇게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시신이 사라진 자리에는 차가운 핏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그 피 웅덩이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핏자국 옆, 아주 미세하게 바닥에 박혀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주 작고 반짝이는 그것은, 마치 작은 보석 조각 같았다. 류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병사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순간을 틈타 재빨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자, 얇고 날카로운 금속 조각임이 드러났다. 햇빛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나는 조각은 작은 십자가 문양을 지니고 있었다. 류진은 이 문양을 또렷이 기억했다. 황궁의 근위대장 ‘칼리안 후작’의 문장이었다. 그는 제국 황실의 가장 신뢰받는 호위이자, 그만큼 오만하고 잔인하다고 소문난 자였다.
칼리안 후작의 문장 조각이 왜 이곳에? 그리고 매화 할머니의 목에 박힌 고급 비단 조각은 또 무엇인가? 단순한 사고사라기엔 너무나 많은 의문점들이 류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병사들은 진실을 덮으려 했지만, 진실은 이렇게 작은 조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류진은 주머니에 금속 조각을 감추고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그의 등 뒤로 병사들의 호통 소리가 여전히 울렸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이제 차가운 불씨를 넘어,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국의 눈을 피해, 이 작은 불씨가 어둠을 밝힐 수 있을지, 류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매화 할머니의 죽음은, 그렇게 류진의 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았다. 이 썩어빠진 제국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