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골만이 앙상하게 남은 돔 경기장은,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을 비웃기라도 하듯 잿빛 먼지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한때 수많은 환호가 터져 나왔을 관중석은 이제 절반 이상이 무너져 내린 채, 간간이 생존자들의 그림자만이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희망보다는 체념과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먼지와 퀴퀴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저 멀리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짐승들의 쉰 목소리, 즉 ‘그림자’들의 낮은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인류의 멸망을 알리는 영원한 자장가 같았다.
“운명결전무회.”
류한은 제 차례를 기다리며 비좁은 대기 공간에 기대어 섰다. 낡은 철판으로 얼기설기 짜여진 무대, 그 위에 얼룩덜룩하게 말라붙은 검붉은 흔적들을 무심히 응시했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이 투기장은 오직 절망과 피로 얼룩진 인류 최후의 발악이었다. 승자는 ‘연합진’의 총지휘권을 얻고, 고성 깊숙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 속 ‘창세의 비전’을 해독할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것이 그림자들을 몰아낼 유일한 희망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아니, 믿고 싶어 했다.
“크으으윽…!”
무대 위에서 들려오는 거친 신음소리에 류한의 시선이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무대를 지배하던 ‘강철권’ 오대수가 간신히 한쪽 무릎을 짚고 서 있었다. 그의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거대한 육중함에도 불구하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오대수의 주먹은 바위를 부수고 강철을 찌그러트린다는 명성을 지녔지만, 지금 그의 주먹에는 핏방울만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비연검’ 이소월이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가볍게 서 있었다. 흑림 문파의 비검술은 말 그대로 제비처럼 빠르고, 칼날은 연기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녀의 가는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살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었고, 흑색 도포 자락은 무대 위를 흐르는 바람에 나부꼈다. 소월의 검 끝에서는 붉은 피 한 방울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오대수의 팔뚝을 깊게 베어낸 상흔의 증거였다.
“젠장… 이 계집애가…!”
오대수가 이를 갈며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 아래 철판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온몸의 근육이 비틀리고 솟아오르며, 강렬한 내공이 뿜어져 나왔다. 투기장을 채운 공기가 순간적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절박함이 류한의 눈에는 비쳤다. 저들은 단순히 승리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인류의 운명을 위해 싸우는 전사들이었다.
“강철! 쇄신권!”
오대수가 포효하며 지면을 박찼다. 콰앙! 굉음과 함께 그의 육중한 몸이 날아올랐고, 거대한 주먹은 흡사 쇠망치처럼 이소월에게 쇄도했다. 파공음이 귀청을 찢을 듯했다. 저 한 방에 맞으면 평범한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쉬이이익!
그러나 이소월은 예상대로 움직였다. 그녀의 경공술은 바람 같았다. 오대수의 주먹이 닿기 직전, 마치 환영처럼 사라졌다. 오대수의 강철권이 허공을 갈랐고, 그 충격파에 무대 바닥의 먼지가 폭발하듯 흩날렸다.
“어디를!”
이소월은 오대수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녀의 ‘비연검’은 허공을 한 번 휘젓더니, 은빛 궤적을 그리며 오대수의 목을 노렸다. 살기를 품은 검날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크윽!”
오대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팔뚝으로 검격을 막아냈다. 쨍그랑!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지만, 소월의 검은 뼈를 깎는 듯한 예리함으로 오대수의 팔뚝을 또다시 깊게 갈랐다. 피가 솟구쳤다. 오대수는 비틀거렸지만, 악착같이 버티며 역으로 팔꿈치로 소월을 찍어 눌렀다.
쾅!
소월은 기민하게 몸을 돌려 오대수의 공격을 피했지만, 그 충격에 잠시 균형을 잃었다. 바로 그때였다. 오대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광기가 번득였다.
“잡았다!”
오대수의 주먹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는 궤적이었다. 이소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푸른빛의 내공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촤르르륵!
검집에서 다시 뽑아낸 ‘비연검’이 마치 살아있는 제비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칼날이 일으킨 바람이 오대수의 주먹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퍽! 챙강!
주먹과 검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검날은 오대수의 단단한 주먹을 깊숙이 파고들었고, 오대수의 주먹은 소월의 검날을 간신히 쳐냈다. 이소월은 그 반동으로 뒤로 크게 밀려났고, 오대수 또한 손등에서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피가 튀었다. 관중석에서는 탄식과 함께 침묵이 흘렀다. 이소월은 입가에 피를 머금은 채 비틀거렸다. 오대수 역시 오른팔이 너덜거렸지만, 그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네놈은… 여기까지다!”
오대수가 다시 한번 포효했다. 왼손으로 지면에 박힌 철판을 부수듯 짚고, 으스러진 오른팔을 애써 들어 올렸다. 피로 물든 주먹에 다시 한번 강철 같은 기운이 서렸다. 그의 남은 힘을 모두 쏟아부을 작정이었다. 필살의 일격.
하지만 그때였다.
휘이이잉…!
경기장 바깥에서 들려오던 그림자들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리고 이어진 끔찍한 비명 소리. 섬뜩한 굉음이 지면을 흔들었다. 경기장 한쪽 벽면에서 거대한 균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마치 거대한 짐승이 심장을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경기장 벽에 세워둔 콘크리트 바리케이드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붉게 빛나는 눈동자와 검은 발톱들이 어둠 속에서 번득였다.
‘그림자들이다…’
류한은 이를 악물었다. 설마 이 경기장까지 직접 침입할 줄은 몰랐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었다.
“상황 발생! 투기장 벽면 붕괴! 그림자 무리가 침입한다! 각 파 문주는 즉시 방어선을 구축하라!”
확성기를 통해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판석에 앉아 있던 노인들이 벌떡 일어섰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대수와 이소월은 서로를 노려보던 눈빛을 거두고,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균열을 응시했다. 승패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더 큰 위협이 닥쳐왔다.
“이런… 망할…!”
오대수는 욕설을 내뱉으며 피 묻은 오른팔을 움켜쥐었다. 이소월 또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은 흔들림 없이 날카로웠다.
류한은 품속의 흑목도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칼집 속에서도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비좁은 대기 공간을 벗어나 무대로 향했다.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무림 고수들의 싸움은 서로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진정한 투쟁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그림자들의 검은 발톱이 균열을 넘어 투기장 안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류한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그의 ‘고요한 발걸음’은 이미 피로 물든 무대 위로 조용히 향하고 있었다. 무명의 검객, 류한. 그의 검 끝에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류한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낮은 속삭임을 들었다.
‘때가 되었다….’
그것은 바람소리 같기도, 환청 같기도 했다. 하지만 류한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의 차례가 온 것이다.
절규의 투기장, 검은 발톱과 무인의 혼이 격돌하는 혼돈 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