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트 마법학교 지하, 금기의 심연
**1화. 오래된 균열의 속삭임**
“김현우! 또 자는 건 아니겠지?”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김현우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안경 너머로 잔뜩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에르난도 교수님의 얼굴이 있었다. 칠판 가득 빼곡히 적힌 고대 룬 문자와 마법 이론 공식들이 그의 졸린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뻔한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깊은 잠에 빠져 꿈속에서 푸딩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아크라시아 마법 학원의 교수들은 이런 사소한 거짓말쯤은 너그럽게 넘어가 주는 관용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현우가 평소 학점 관리를 그럭저럭 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생각? 아주 깊이도 잠겨 있었겠군.” 에르난도 교수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칠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 그럼 김현우, 이 마나 파동 이론이 현실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아차. 이건 또 무슨 질문인가. 현우는 머리를 굴렸다. 마나 파동 이론. 분명 어제 대충 훑어본 내용인데, 푸딩 꿈이 그 모든 것을 리셋해 버린 모양이었다. 힐끔 옆자리를 보니, 수석인 최유진은 이미 교과서를 펼쳐 놓고 그를 동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음… 마나 파동 이론은… 물질의 근원적 에너지 흐름을 파악하여… 현실 세계의 물리 법칙을 왜곡하거나 재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단어를 총동원한 그럴듯한 답변이었다. 에르난도 교수는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현우를 한참 노려보았다.
“그래. 아주 교과서적인 답변이군. 칭찬해 주지.” 교수의 비꼬는 듯한 목소리에 반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하지만 다음번에도 또 이런 식이라면, 내 강의실에서는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을 거야. 알아들었나?”
“네, 교수님!” 현우는 크게 대답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쪽팔림은 잠시였다. 이 정도는 아크라시아 학원 생활의 일상이었다.
아크라시아 마법 학원. 이곳은 마법사들의 요람이자,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 마법계를 이끄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현대적인 도시의 스카이라인 한가운데서 마치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웅장한 아치형 입구,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높은 천장, 마나가 흐르는 대로를 따라 빛나는 마법 램프들. 이 모든 것이 이곳이 평범한 학교가 아님을 증명했다.
졸업생들은 사회 각 분야의 요직을 차지하거나, 전설적인 던전 공략대에 합류하여 명성을 떨쳤다. 아크라시아 학생이라는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고,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다. 현우는 간신히 턱걸이로 들어온 축에 속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졸업할 때까지는 평화로운 학원 생활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평화’라는 단어는 현우의 사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현우는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도서관에 들러 전공 서적을 반납하고, 교수님의 심기를 거스른 대가로 부여받은 ‘특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법 재료실로 향해야 했다. 특별 과제란, 대개는 귀찮고 고된 허드렛일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번에는 특정 등급의 마나석을 분류하고 재고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마법 재료실은 학원 본관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공기가 현우를 맞았다. 쾌적한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수많은 선반에는 온갖 희귀한 약초, 몬스터의 부산물, 정제된 마나석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퀘퀘한 먼지 냄새와 알 수 없는 약초 향이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하아, 이걸 언제 다 분류하지?”
현우는 한숨을 쉬며 재료실 관리인에게서 받은 작업 지시서를 펼쳤다. 관리인은 늘 그렇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밤늦게까지 해도 상관없으니, 실수 없이 정확하게 하라”고 경고했다.
작업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돋보기 마법으로 마나석의 등급을 확인하고, 무게를 측정하고, 종류별로 나누는 반복적인 과정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우의 정신은 다시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음?”
무언가 익숙지 않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일반적인 재료실의 먼지 냄새나 약초 향이 아니었다. 아주 희미했지만, 마치 오랫동안 갇혀 있던 흙과 쇠붙이, 그리고 그 밑에 깔린 무언가 시큼하고 끈적한 향이 섞인 듯한 냄새였다. 지하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듯한 서늘한 바람도 느껴졌다.
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 재료실은 거대한 공간이었지만, 한쪽 벽면 구석에는 낡은 철문이 하나 있었다. 평소에는 그저 창고나 비상구쯤으로 생각했던 문이었다. 문에는 어떤 마법적인 봉인도, 잠금장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낡고 녹슨 철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문 너머에서 냄새와 서늘한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여기는 뭐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현우는 작업 지시서를 잠시 내려놓고 철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냄새는 더욱 선명해졌고, 서늘함은 더욱 뼈를 파고드는 듯했다. 녹슨 철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주 약간 열려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드나든 흔적 같았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안쪽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손전등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망설여졌다. 이곳은 학원 내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 구역이었다.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조차 발길을 잘 하지 않는 곳이었다.
어렴풋이 들었던 소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학원 지하 깊은 곳에는 오래된 유적, 혹은 폐쇄된 연구 시설이 있다는 이야기. 아니면, 학원의 어두운 역사를 상징하는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다는 기괴한 소문도 있었다. 대개는 선배들이 신입생들을 겁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고 치부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소문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현우는 망설임 끝에 손전등 마법을 시전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희미한 빛이 어둠을 가르며 전진했다. 빛이 닿은 곳은 좁고 긴 복도였다. 벽면은 거칠게 다듬어진 석재로 이루어져 있었고, 천장은 낮았다. 습기가 가득한 공기는 답답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복도 양옆으로는 낡은 철창들이 보였다. 마치 감옥의 복도 같았다.
“이게 뭐야…?”
현우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학원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발소리가 축축한 복도를 따라 음산하게 울렸다. 빛이 닿는 곳마다 희미한 형상들이 드러났다. 철창 안쪽에는 낡고 녹슨 도구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고, 어떤 곳은 아예 텅 비어 있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어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현우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가장 안쪽에 있는 철창 안쪽, 벽면에 새겨진 오래된 문양이었다. 빛이 닿자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다.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겹겹이 이어진 기하학적 형태들은 흡사 눈을 연상시키는 듯했고, 그 중심에는 기괴한 심장이 박동하는 듯한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그 문양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문양 바로 아래, 벽에는 붉은색으로 덧칠된 듯한 흔적이 있었다. 희미했지만, 누군가 손톱으로 긁어낸 듯한 자국들이 여러 개 보였다. 그 자국들 사이로 굳어버린 검붉은 얼룩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피.
현우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차가운 피가 흐르는 듯한 오싹함이 전신을 감쌌다. 누군가 이곳에 갇혀 절규하며 남긴 흔적임이 분명했다. 학원 지하에 이런 곳이 있고, 이런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복도 끝,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으읍… 흐으읍…*
마치 숨을 들이쉬는 듯한, 혹은 무언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 기계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고, 동물의 울음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이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소리는 어둠 속에서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곳에 무언가가, 살아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직감.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는 빛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성은 당장 이곳을 벗어나라고 소리쳤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 듯했다.
그리고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마치 바로 뒤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거기, 있니…?*
섬뜩한 목소리.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쉰 듯했고, 어딘가 비틀려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물속에 잠겨 있다 나온 듯한, 혹은 찢어진 살에서 겨우 새어 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현우는 숨을 들이켜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그는 차마 뒤를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의 손에서 빛이 꺼져 버렸다. 주위는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그 기이한 소리는 계속해서 현우를 불렀다.
*—찾아왔구나… 오랜만에…*
이번에는 웃음소리 같기도 했다. 으스스한, 섬뜩한 웃음소리. 현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을 향해 내달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낡은 철문을 통해 마법 재료실로 뛰쳐나왔을 때,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에 기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마법 재료실의 익숙한 먼지 냄새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닫힌 철문을 바라보았다. 그 문 너머에는… 대체 무엇이 있었던 걸까. 이 학원 지하에 숨겨진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현우의 발밑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밟혔다. 고개를 숙이자, 손에 들려 있던 손전등 마법의 잔광이 희미하게 비추는 작은 펜던트가 보였다. 낡고 오래되어 보였지만, 한때는 꽤 귀한 물건이었을 터였다. 펜던트의 한쪽 면에는 아까 지하 복도에서 본 것과 똑같은, 눈과 심장이 겹쳐진 듯한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현우는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건… 방금 자신이 도망쳐 나온 그곳에 있던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 흘린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가 자신을 이끌기 위해 남긴 것일까?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섬뜩한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오랜만에…*
김현우는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학원의 지하에 잠들어 있는, 너무나 끔찍하고 거대한 금기의 존재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의 평화로운 학원 생활은 이제 끝난 듯했다. 모든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