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망가졌다. 더 이상 푸른 하늘이나 깨끗한 물, 상쾌한 공기 같은 건 사치였다. 도시들은 거대한 흉터처럼 늘어져 있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 흉터 속에서 부스러기를 찾아 헤매거나, 아예 잊혀진 땅으로 숨어들었다. 나는 후자였다. 적어도, 될 수만 있다면.
지우는 녹슨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2층 건물 잔해 위에서 망원경을 켰다. 폐허가 된 슈퍼마켓은 언제나 그렇듯 침묵에 잠겨 있었다. 고요함. 살아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지우의 덕목을 비웃듯, 소란스러움을 던져주곤 했다.
“흐읍, 흐읍… 저, 저기요! 누가 계세요?”
젠장.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망원경의 초점을 맞췄다. 슈퍼마켓 정문이 있어야 할 곳, 철문이 간신히 한쪽만 매달린 채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곳에서, 녀석이 나타났다. 바싹 마른 먼지투성이 청바지에 흙투성이 재킷을 걸친 남자. 등에는 한눈에 봐도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낡은 배낭이 메어져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손에 들린 것이었다.
“이거… 사과, 맞죠? 설마 독이 든 건 아니겠지?” 남자는 낡은 천 조각으로 조심스럽게 뭔가를 닦고 있었다.
지우의 눈이 번뜩였다. 사과? 그 귀하디귀한, 이제는 전설 속 과일이 되어버린 사과를 저 멍청한 남자가 들고 있다고? 그것도 저렇게 대놓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봐요!” 지우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남자, 민준은 고개를 획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그가 그녀의 총구와 마주쳤다. “거기 서요. 당신, 뭐 하는 짓이야.”
민준은 사과를 든 채로 얼어붙었다. 마치 사과가 방금 죄를 고백한 양. 그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만은 이상하리만큼 맑았다.
“아, 저기… 그게, 제가 뭘 잘못했나요? 저는 그냥… 배가 고파서.”
“배가 고픈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사과를 찾아내서 그렇게 요란하게 소란을 피우면, 주변에 뭐가 꼬일 줄 몰라?”
민준은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오랜만에 먹을 만한 걸 봐서 그만.” 그는 사과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이 어딘가 어설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독한 절박함을 느끼게 했다.
지우는 한숨을 쉬었다. 이 폐허에서 살아남으려면 철저히 계산적이어야 했다. 감정은 사치였다. 하지만 저 사과 한 조각에 온 마음을 빼앗긴 듯한 남자의 눈빛은, 잊고 있던 뭔가를 건드렸다.
“그 사과, 어디서 났어?”
“여기, 이 슈퍼마켓 지하 창고에요! 간신히 물이 새지 않는 곳에 몇 개 남아있더라고요. 물론… 좀 쪼그라들고 빛도 바랬지만, 썩진 않았어요.” 민준의 목소리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지우는 총을 내렸다. “길동무가 필요해?” 그녀는 딱딱하게 물었다.
민준의 눈이 커졌다. “네? 길…동무요?”
“그래. 너 혼자 돌아다니다간, 그 사과를 포함해서 네가 가진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게다가 너처럼 요란스러운 놈은 주변에 위험을 몰고 다닌다고. 내가 널 감시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지우는 최대한 비정하게 말했다. 사실은, 그 사과가 탐이 났고, 혼자 버티는 것이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혼자라는 건, 가끔씩 세상의 고요함보다 더 잔인했다.
민준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그 미소는 폐허가 된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기괴하리만치 밝은 미소였다. “저야 감사하죠! 저는 민준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 나야말로 잘 부탁해, 민준. 네가 짐덩이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야.”
그들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민준은 짐덩이였다. 아니, 짐덩이라기보다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 덩어리였다.
“지우 씨! 저기 보세요! 저 꽃, 아직도 피어있어요! 정말 예쁘죠?”
지우는 민준이 가리키는 방향을 힐끗 보았다. 시멘트 균열 사이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민, 이름 모를 작은 꽃이었다. 이런 세상에서조차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경외심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우의 생존 본능은 아름다움보다 위험 신호에 먼저 반응했다.
“그 꽃 근처에 뭐가 있을지 몰라. 뱀이나 쥐, 아니면 더 위험한 놈들.”
“아, 역시 지우 씨는 현실적이시네요! 저는 이럴 때마다 지우 씨가 곁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민준은 해맑게 웃으며 지우를 쫓아왔다.
지우는 속으로 ‘든든하긴 개뿔, 내 속만 터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민준의 낙천적인 태도는 가끔 그녀의 날카로운 신경을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혼자였으면 온종일 긴장 속에 살았을 텐데, 민준은 마치 작은 태양처럼 끊임없이 에너지를 뿜어냈다. 물론 그 에너지가 가끔은 폭주해서 문제였지만.
한번은 오래된 폐차 더미 속에서 부품을 찾고 있을 때였다. 민준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녹슨 캔을 발견했다.
“지우 씨! 이거 보세요! 통조림이에요! 아직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섣불리 만지지 마! 유통기한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통조림은 조금이라도 부풀어 있으면…”
쾅!
지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준은 그 캔을 돌멩이로 내리찍었다. 찌그러진 캔 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우웩! 이게 무슨 냄새예요!” 민준은 코를 막고 뒷걸음질 쳤다.
지우는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가 뭐랬어. 통조림은 신중해야 한다고. 그걸 그대로 먹었으면 넌 지금쯤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거야.”
민준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늘 이렇게 일을 망치죠.”
그의 풀 죽은 모습에 지우는 어쩐지 마음이 약해졌다. “아니. 망치진 않았어. 덕분에 우리가 먹지 말아야 할 걸 확실히 알게 되었잖아? 다음부터는 전문가에게 맡겨.” 그녀는 자신의 등에 메인 공구 가방을 톡톡 두드렸다.
민준은 다시 활짝 웃었다. “지우 씨가 최고예요!”
지우는 헛기침을 했다.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몸이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떠도는 ‘녹색 지대’를 찾아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황폐한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식물이 자란다는, 살아있는 땅. 민준은 그곳이 마치 낙원이라도 되는 양 설레어했고, 지우는 그저 좀 더 안전하고 자원이 풍부한 곳을 바랐다. 어쨌든 같은 목표였다.
***
낡은 버스 차체를 개조한 그들의 임시 거처 안은 눅눅하고 먼지투성이였지만, 비바람을 피하기엔 충분했다. 밖에는 사막과도 같은 황량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모래먼지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흡사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젠장, 이런 날씨에 이동하는 건 미친 짓이야.” 지우는 낡은 라디오를 만지작거렸다. 미약한 신호음만 들릴 뿐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지우 씨. 어차피 이 근처에는 딱히 갈 곳도 없었어요.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죠.” 민준은 캔에 물을 데워 컵라면 한 개를 불리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귀한 비축 식량이었다.
“쉬는 건 나쁘지 않지만, 연료도 식량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지우는 날씨 때문에 발이 묶인 상황이 불안했다. 이런 세상에서는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이 곧 죽음이었다.
“맞아요. 하지만 지우 씨가 워낙 계획을 잘 세우시니까, 분명 좋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저는 지우 씨를 믿어요!”
지우는 컵라면 김이 서린 민준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맑았다. “나를 믿는다고? 네가 날 믿는다고 해서 연료가 생겨나는 건 아니야.”
“그래도 힘이 되잖아요. 지우 씨는 혼자가 아니니까요.” 민준은 컵라면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먼저 드세요.”
지우는 묵묵히 컵라면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김이 얼굴을 스쳤다. 이상하게도, 그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이 혼돈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것. 그 사소한 사실이 닳아버린 엔진에 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지우는 잠들지 못하고 민준을 관찰했다. 그는 낡은 침낭에 몸을 웅크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끔 잠꼬대처럼 “녹색… 지대…”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이런 세상에서 저렇게 순수하게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저런 멍청한 낙천주의가 필요한 걸지도 몰라.’ 지우는 생각했다. 혼자서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만 가정하며 살았다. 하지만 민준은 언제나 최선을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은, 지우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작은 기적을 만들곤 했다.
다음날 아침, 바람이 잦아들자 지우는 일찍부터 정비에 나섰다. 어제 라디오에서 잡혔던 미약한 신호음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혹시… 구조 신호였을까?”
“지우 씨! 이거 보세요! 어제 바람에 날려왔나 봐요!” 민준이 지우에게 낡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폐허가 된 학교 건물. 식량과 물. 안전.’ 그리고 어설픈 약도와 함께 낡은 라디오 주파수가 적혀 있었다. 바로 어제 지우가 잡았던 그 주파수였다.
지우의 눈이 번뜩였다. “이런 우연이… 민준, 너 혹시 행운을 몰고 다니는 타입이냐?”
민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저는 지우 씨가 곁에 있어서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아요!”
지우는 고개를 저으며 픽 웃었다. “이번엔 네 덕분이라고 해두지. 좋아, 민준. 우리 목적지를 잠시 변경하자. 저 학교로 가자.”
그들은 학교를 향해 달렸다. 낡은 버스는 먼지를 풀풀 날리며 황량한 길을 달렸다.
***
폐교는 겉보기엔 여느 폐허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민준이 종이에 적힌 대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안에서는 희미한 불빛과 함께 온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몇 명의 생존자들이 그들을 반겼다. 아이들과 노인, 그리고 젊은 부부 한 쌍이었다. 그들은 모두 지쳐 보였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누구세요? 어떻게 여기까지…” 젊은 부부 중 한 명이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우는 낡은 종이를 내밀었다. “이걸 보고 왔습니다. 여기, 혹시… 안전한가요?”
그들은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쉬었다. “들어오세요. 외부인이 온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안에는 작은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었고, 벽에는 직접 재배한 듯한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식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깨끗한 물과 잠시 쉬어갈 곳은 충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라디오로 구조 신호를 보내왔으며, 이 학교를 작은 피난처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민준은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사탕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지우 씨, 보세요! 여기 사람들이 서로 도우면서 살고 있어요! 정말 따뜻한 곳이에요!”
지우는 그런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원래 이런 곳에 속해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의 낙천주의는 이곳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지우는 늘 혼자였고, 혼자가 안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광경은 그녀의 믿음을 흔들었다.
며칠 동안 그들은 학교에 머물렀다. 지우는 낡은 발전기를 고치고, 식수 정화 장치를 손봤다. 민준은 아이들과 놀아주고,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밝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밤이 되면 그들은 한데 모여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민준이 찾아낸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를 들었다.
어느 날 밤, 지우는 조용히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민준 곁에 앉았다.
“민준.”
“네, 지우 씨?”
“넌… 왜 그렇게 낙천적이야? 이 세상이 어떤 곳인 줄 모르지 않아?”
민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뿌연 먼지 때문에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알죠. 지독한 곳이죠. 하지만… 제가 비관적이라고 해서 세상이 더 나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웃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는 지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지우 씨 같은 분이 곁에 있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용기가 생겨요. 지우 씨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지우는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이 그녀의 단단했던 마음을 허물어뜨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고, 혼자 살아남는 것에 익숙했다. 하지만 민준과 함께하며, 그녀는 이 지독한 세상에서도 따뜻한 온기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학교 사람들은 그들에게 작은 식량과 물을 나누어 주었고, 곧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지우 씨! 민준 씨! 꼭 녹색 지대에 도착하세요!”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낡은 버스에 올라타 시동을 걸던 지우는 문득 민준에게 물었다. “너, 내가 왜 너랑 같이 가는지 알아?”
민준은 지우의 옆자리에서 환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제가 없으면 지우 씨가 심심하잖아요! 그리고 지우 씨는 절 필요로 하니까요!”
“피식.” 지우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네가 가진 그 멍청한 낙천주의가,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내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될 것 같아서 그래.”
민준은 지우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옆얼굴은 여전히 무심해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그 속에 숨겨진 작은 진심이 보였다.
“그럼 저, 아주 열심히 멍청해져 볼게요! 지우 씨가 희망을 잃지 않도록요!” 민준은 허리에 찬 낡은 물통을 두드리며 외쳤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 대신 내 허락 없이는 아무 캔도 따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황량한 먼지 길을 가르며 버스는 다시 남쪽을 향해 달렸다. 세상은 여전히 황폐했고, 녹색 지대가 정말 존재하는지,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지우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멍청하지만 따뜻한 남자와 함께라면,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이 지독한 세상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확실한 ‘녹색 지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진정한 녹색 지대는 더 이상 멀리 떨어진 어딘가가 아니라, 바로 이 낡은 버스 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우는 오랜만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로맨틱 코미디는 언제나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