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침실 스탠드의 은은한 불빛 아래,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 내 손안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닳아 해진 표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종이 냄새는 이제 내게 가장 익숙한 향기가 되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할머니의 젊은 날의 숨결이 스며 나오는 듯했다. 지난밤 읽었던 애틋한 기억들이 아직 심장을 먹먹하게 누르고 있는 와중에, 나는 조심스럽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오늘의 기록은 유독 잉크가 번지고 글씨가 흐트러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울면서 쓴 글처럼, 글자들 사이에서 할머니의 격정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날짜는 1957년 초여름. 아직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그 시절, 그러나 희망의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 여름, 나의 유월
1957년 6월 12일, 맑음, 그리고 흐림
지훈이가 떠난다고 했다. 밤새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그의 손을 잡고 강변을 걷던 어제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는데, 그는 벌써 저 먼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첫 세상이자 전부였다. 봄이면 새싹이 돋아나는 들녘에서 함께 풀피리를 불었고, 여름이면 개울가에 발을 담그고 물장구를 쳤다. 가을이면 탐스럽게 익은 감을 따다 서로의 입에 넣어주었고, 겨울이면 눈밭을 걸으며 미래를 꿈꿨다. 우리의 미래는 늘 맑고 푸른 하늘처럼 영원할 줄 알았다.
“미영아, 나 서울로 올라가야 해. 큰형님 사업이 어려워져서, 내가 돈을 벌어야 한대.”
어제 저녁, 해 질 녘 노을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일 때, 지훈이는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어깨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붉게 물든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언제 돌아와?”
겨우 쥐어짜낸 내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내 손을 잡고, 작은 돌멩이 하나를 쥐여주었다. 냇가에서 함께 주웠던, 하트 모양을 닮은 매끄러운 돌멩이였다.
“기다려 달라는 말도, 가지 말라는 말도 못 하겠어. 미영아, 하지만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두고 가는지 알아줘. 내가 꼭 성공해서 돌아올게. 그때까지… 그때까지 부디 너의 자리에서 잘 지내줘.”
그의 말은 칼날처럼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의 말에서 ‘언제’라는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읽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다는 잔인한 예감을 동시에 느꼈다. 우리 가족 또한 보리쌀 한 톨이 아쉬운 시절이었다. 그의 어깨에 얹힌 짐의 무게를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나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것을 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나는 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음을 느꼈다. 그 밤, 우리는 강물처럼 서로의 눈물을 섞으며 아득한 이별을 예감했다.
그가 떠나는 날은 내일 아침이다. 차마 그를 배웅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의 세상이, 나의 유월이, 이대로 멈춰버린 것만 같다. 나는 이 돌멩이를 평생 간직할 것이다. 이 작은 돌멩이가 우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일기장 속 글은 여기서 끝이 났다. 글씨는 심하게 번져 있었고, 마지막 문장은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일기장을 붙들고 있었다. 할머니의 젊은 날의 사랑과 이별이 이렇게나 아팠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늘 온화하고 강인한 분이셨다. 평생 할아버지 곁을 지키며 자식들을 키워냈고, 힘든 시절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이렇게 가슴 저미는 첫사랑과의 이별이 있었으리라고는… 지훈이라는 이름, 하트 모양의 돌멩이. 할머니 방 서랍에서 발견했던, 바래고 윤기 없는 그 돌멩이가 퍼뜩 머릿속을 스쳤다. 할머니는 그 돌멩이를 낡은 손수건에 싸서 평생 간직하셨던 것이다. 그 돌멩이가 단순한 조약돌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할머니가 아닌, 미영이라는 이름의 소녀가 겪었을 그 아픈 이별에 대한 연민, 그리고 평생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았을 그리움에 대한 슬픔이 함께 밀려왔다. 할머니는 그 이후로 지훈을 다시 만났을까? 아니면 영원히 헤어져, 가슴에 묻고 사셨던 걸까?
내 손에 들린 일기장은 다음 페이지로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흘러갔을까. 잠 못 이루는 밤은 깊어가고, 나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