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다. 서연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꿈의 잔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흐릿한 수채화처럼 번져가는 이미지들 속에서 유독 선명한 것이 있었다. 낡은 작업복을 입고 온화하게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 그리고 그의 등 뒤로 펼쳐진, 별이 쏟아지는 유리돔.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꿈결처럼 들려오던 잔잔한 멜로디가 마치 귓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오래된 오르골에서나 나올 법한, 애틋하면서도 아련한 선율.
별을 품은 유리돔
서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의 세포가 잊고 있던 기억을 갈망하듯 아우성쳤다. 지난 몇 달간, 파편처럼 조각나 있던 기억들이 점점 더 선명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어젯밤 꿈은 마치 닫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빛 같았다. 유리돔. 별. 남자. 그리고 그 멜로디.
“유리돔….”
그녀의 입술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단어였다.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곳에서 ‘살았던’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휴대폰을 들고 검색창에 ‘유리돔 천문대’, ‘오래된 천문대’ 등의 단어를 입력했다. 수많은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이미지는 없었다.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동시에 지워지지 않는 확신이 그녀를 지배했다. 어딘가에 그곳이 존재할 것이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그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홀린 듯 방 한구석에 놓인 낡은 LP 플레이어 앞으로 다가갔다. 우연히 얻게 된 LP 판들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먼지 쌓인 커버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끌렸다. 바늘을 조심스럽게 올리자, 스피커를 통해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꿈에서 들었던 바로 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서연은 숨을 멈췄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LP 판을 뒤집자, 손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보였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종이였다.
"별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다시 만나기를.
'노스텔지아'가 너를 이끌어 줄 것이다."
‘노스텔지아’는 지금 흘러나오는 이 멜로디의 제목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 지번이 적혀 있었다. 흐릿하지만 분명한 주소. 외곽 지역에 위치한 오래된 주소였다.
잊혀진 약속의 장소
태민은 서연의 손에 들린 LP 판과 메모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서연 씨, 이거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누가 장난쳐 놓은 걸 수도 있잖아요. 이런 낡은 주소에 뭐가 있을 거라고….”
“아니요, 태민 씨. 이건… 이건 진짜예요. 제 심장이 말해주고 있어요.”
서연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강렬한 빛이 감돌았다. 태민은 그녀의 표정에서 그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을 읽었다.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도시의 외곽, 숲으로 둘러싸인 고지대였다. 낡고 녹슨 철문이 그들을 맞이했다. ‘XX 천문 연구소’라고 쓰인 간판은 글자가 지워져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태민의 말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발걸음이 망설여졌다.
“여기가… 꿈에서 본 그곳이에요.”
서연은 마치 홀린 듯 굳게 닫힌 문으로 다가갔다. 녹슨 경첩은 삐걱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낡은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인적 없는 건물들 사이로 거대한 유리돔이 모습을 드러냈다. 깨진 창문과 덩굴이 뒤덮인 모습이었지만, 서연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꿈에서 본 바로 그 별을 품은 유리돔이었다.
유리돔 내부로 들어서자, 부서진 망원경과 낡은 장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때 활기 넘쳤을 공간은 이제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먼지 가득한 공기 속에서 그녀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쿵, 쿵, 쿵. 심장이 더욱 격렬하게 울렸다. 마치 잃어버린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 듯한 감각이었다.
그녀는 한쪽 벽면에 놓인 낡은 철제 캐비닛 앞으로 다가갔다. 캐비닛 문은 녹슬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손이 닿았다. 덜컥, 열린 캐비닛 안에는 낡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노트와 몇 장의 사진, 그리고 작은 USB가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꿈에서 본 바로 그 남자, 그리고 그 옆에 활짝 웃고 있는 그녀, 서연의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사진 속 서연은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눈빛은 반짝였다. 그녀는 사진을 움켜쥐었다. 잊혀진 시간 속에서 그녀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그들의 메시지
태민은 서연이 발견한 USB를 조심스럽게 노트북에 연결했다. 오래된 파일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그중 ‘나에게_최종’이라고 쓰인 영상 파일이 눈에 띄었다. 서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떨리는 손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는 사진 속 그 남자가 나타났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깊어진 눈가의 주름, 하지만 온화한 눈빛은 여전했다. 그는 서연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미소였다.
“서연아… 아니, 이제는 ‘리나’라고 불러야 하나. 내 사랑하는 제자이자… 딸 같은 너에게, 이 메시지가 닿기를 바란다.”
리나? 서연의 이름이 리나였다는 말인가? 혼란스러웠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는 ‘교수님’이라고 불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존재했던, 연구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남자.
교수님의 목소리는 떨렸다. “미안하다, 리나. 네가 이 메시지를 보고 있다면, 아마 모든 기억을 잃었을 거야. 시간 이동의 부작용이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템포럴 스테빌라이저’가 예상보다 불안정했어.”
시간 이동… 템포럴 스테빌라이저… 서연의 뇌는 엄청난 정보의 홍수에 잠겼다. 그녀가 시간 여행자였다는 말인가? 기억을 잃은 채, 과거로 떨어진 이방인. 모든 퍼즐 조각이 서서히 맞춰지는 듯했다.
“우리의 임무는… 아주 중요했다. 2223년의 대재앙을 막기 위해, 너는 반드시 2023년으로 돌아와야 했어. 하지만 그들이… 그들이 우리를 쫓고 있었다. 너를 안전하게 보내기 위해, 기억 삭제 프로토콜을 가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억 봉인 장치가 손상되면서, 너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 거야.”
그들. 그들은 누구인가? 대재앙. 2223년. 모든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이 시대에 머물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막아야 할 미래의 재앙이 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미래를 구원하기 위한 마지막 희망이었다.
교수님의 얼굴은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리나. 네가 기억을 되찾고 임무를 완수해야만 해. 이 연구소 어딘가에, 너의 임무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핵심 장치’가 숨겨져 있을 거야. 잊지 마라, 리나.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경계해야 해. 그들이 너를 찾아내기 전에….”
영상은 갑자기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화면은 정지했고, 교수님의 마지막 경고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들이 너를 찾아내기 전에….”
서연은 망연자실한 채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그녀의 이름은 리나였다. 그녀는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반드시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떠내려온 그녀는, 이제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이내 강렬한 결의로 가득 찼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리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깨진 유리 사이로 먹구름 낀 하늘이 보였다. 마치 그녀의 앞날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때, 유리돔 밖에서 희미하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교수님의 마지막 경고가 섬뜩하게 되살아났다. ‘그들이 너를 찾아내기 전에….’
서연은 태민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의 침묵 속에서, 새로운 시간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