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곳이 아직 남아있었나.」
현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그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마법 함정과 미로 같은 통로들이 이어지던 곳과는 차원이 다른 공기였다. 눅진한 습기와 함께 흙먼지가 섞인, 축축하고 무거운 고요함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했다. 발소리마저 눅진하게 먹어 들어가는 바닥은,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밟지 않은 탓에 두터운 이끼와 먼지층으로 뒤덮여 있었다.
“현님, 이쪽은… 이전과는 많이 다르네요.”
리아가 긴 지팡이 끝에 매달린 마나석을 밝게 빛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어둠을 걷어내자,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거대한 공간의 파편들이었다. 이전의 통로들이 거친 돌과 투박한 마법 장치로 이루어졌다면, 이곳은 어딘가 고풍스럽고 섬세한 손길이 닿은 듯한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카엘은 낡은 철갑옷의 어깨를 으쓱하며 큼지막한 양손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벽면은 무언가 고대 문자의 잔해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이게… 정말 지하 유적이 맞나? 꼭 거대한 동굴 안에 통째로 건물을 지어 넣은 것 같군.”
카엘의 말대로였다. 푸른 마나석의 빛이 닿는 곳마다, 거대한 자연 동굴의 천장과 벽을 따라 인공적인 구조물들이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용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괴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현은 손바닥을 펼쳐 공기의 흐름을 감지했다. 미약하지만, 먼 곳에서부터 희미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단순히 잔류 마나가 아니라, 마치 심장이 뛰는 듯한 규칙적인 파동이었다.
‘이건… 단순한 유적이 아니야. 살아있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어.’
그의 등골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전생의 기억 속, 현대의 고고학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생경한 감각이었다. 이세계로 넘어온 후, 그에게 발현된 ‘마나 감지’ 능력은 이런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더 깊이 들어가 봐야 알 것 같군. 카엘, 리아, 경계를 늦추지 마.”
현의 말에 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선두에 섰다. 묵직한 발걸음이 울릴 때마다 먼지가 훅 하고 피어올랐다. 거대한 홀의 중앙으로 나아갈수록, 희미했던 고대 문자와 조각들이 점차 선명해졌다.
리아가 마법을 이용해 주변의 먼지를 걷어내자, 마침내 그들의 시야에 거대한 벽화가 드러났다. 홀의 한쪽 벽면을 통째로 뒤덮고 있는 벽화는, 푸른 마나석의 빛 아래서도 어딘가 오묘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그림이지?”
카엘의 감탄사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벽화는 놀랍도록 생생했다.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들 속에서, 알 수 없는 형상의 존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를 숭배하는 인간의 모습, 날개를 가진 듯한 기이한 생명체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잿빛 폭풍처럼 집어삼키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
현은 벽화에 손을 댔다. 차가운 돌의 감촉 너머로, 희미한 마나의 잔류가 느껴졌다. 그의 마나 감지 능력은 벽화 속에서 한 줄기 끈처럼 이어지는 미세한 마나의 흐름을 포착했다. 벽화의 모든 선과 색채 하나하나에 마나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건 단순한 그림이 아니야. 마나로 그려진, 일종의 기록… 아니, 기억 그 자체일 수도 있어.”
“기억이요?” 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래. 이 문양들은… 특정 마나 흐름을 발생시켜. 마치 이야기책처럼.” 현은 벽화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거대한 나무 아래, 사람들이 춤을 추는 부분이었다. “이곳의 마나 흐름은 평화와 풍요를 나타내고 있어. 아마 이 그림들은 이 유적을 건설한 고대 문명의 삶을 보여주는 거겠지.”
하지만 현의 시선은 곧 벽화의 중앙, 그리고 가장 위쪽에 그려진 검은 그림자에 꽂혔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강력하고, 불길했으며,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압도적인 파괴와 절망의 감각이 현의 심장을 짓눌렀다.
“이 검은 그림자는… 이 문명을 파멸시킨 존재인가?” 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단순히 파멸시킨 것이 아닐 수도 있어.” 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마나 감지 능력은, 검은 그림자 부분에서 벽화 안쪽으로, 마치 뿌리처럼 뻗어나가는 마나의 줄기를 포착했다. 그 줄기는 벽화 깊숙한 곳, 아니 어쩌면 벽화 너머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벽화는… 어떤 봉인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것 같아.”
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홀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투두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작은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리아의 마나석이 흔들리며 어둠과 밝음을 번갈아 비췄다.
“무슨 일이에요, 현님?!” 리아가 경악하며 외쳤다.
“젠장! 무너지는 건가?!” 카엘은 재빨리 방패를 들어 올리며 현과 리아를 보호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진동은 건물 전체가 무너지는 굉음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듯한, 둔중하고 일정한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울림은 현이 벽화에서 감지했던, 검은 그림자의 마나 파동과 정확히 일치했다.
현의 시선은 다시 벽화의 검은 그림자 부분으로 향했다. 거대한 형체가 새겨진 곳에서부터 희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는 균열 사이로, 검붉은 빛이 일렁였다.
“이런… 이걸 깨워 버렸군.”
현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균열은 빠르게 번져 나갔다. 검붉은 빛은 점차 강해져, 홀 전체를 섬뜩한 색으로 물들였다. 벽화 속에서 느껴지던 차가운 절망의 기운이 실제처럼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벽화의 가장 중앙, 검은 그림자의 심장부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균열이 열렸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어둠처럼 꿈틀거리는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냉기와, 존재 자체가 지닌 순수한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둠… 안에서 뭔가 나오고 있어!” 리아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현은 몸을 굳혔다. 그의 마나 감지 능력은, 균열 너머에서 헤아릴 수 없는 존재가 깨어나는 것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전생의 그 어떤 지식으로도, 이세계에서의 그 어떤 경험으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존재.
벽화 속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