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고요했으나, 그 고요함 속에는 언제나 찢겨질 준비가 된 비명이 숨 쉬고 있었다.
자정 무렵, 수도 아르카디아를 가로지르는 잿빛 강물 위로 낡은 돌다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옅은 달빛이 부서진 구름 사이로 간신히 새어 나와 삐걱이는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과 섞이며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시온 님, 부디 서둘러 주십시오!”
어둠을 뚫고 달려온 전령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리춤의 칼자루를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빗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그의 얼굴은 공포와 절박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시온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손에 들린 낡은 양피지 문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은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겨우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시온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고요히 종이 위를 스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전령께서는 폐하의 어명을 전하는 것도 아닌데, 이토록 무례한 걸음은 처음이군요.”
시온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서늘한 지성은 전령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급함이 그의 공포를 짓눌렀다.
“죄송합니다, 시온 님! 하지만… 달빛 저택에서… 대사서 카엘렌 경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손에 들린 양피지가 스르륵, 탁자 위로 떨어졌다. 시온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비로소 전령에게 향했다. 길고 섬세한 그의 속눈썹 아래로 감추어진 눈빛은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 차분했다.
“카엘렌 경께서요? 심장마비라도 오셨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살해당하셨습니다! 그것도… 서재에 갇힌 채로… 안에서 문이 단단히 잠겨 있었고, 마법 봉인도 온전히 유지되어 있었다고요!”
전령의 목소리가 절규에 가까웠다. 시온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기다란 그림자가 촛불에 일렁이며 벽을 춤추듯 오갔다.
“달빛 저택이라… 흥미롭군요.”
그는 어깨에 걸쳐둔 낡은 외투를 여미며 밖으로 나섰다. 빗방울이 그의 얼굴에 부딪혔지만, 시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령은 그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저 분은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저런 비극 앞에서도 저리 고요할 수 있을까?’
***
달빛 저택은 이름처럼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거대한 달빛석으로 쌓아 올린 외벽은 희미한 달빛을 반사하며 은은한 푸른빛을 띠었고, 지붕 위로는 별자리 형상을 한 첨탑들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지금 그 아름다운 저택 위로는 불길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저택의 정원에는 근위대원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고, 횃불의 불꽃이 빗물에 젖은 공기 속에서 흔들렸다.
“시온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택 입구에서 굳은 얼굴로 서성대던 근위대장 발레리우스가 시온을 보자마자 급히 다가왔다. 그의 은색 갑옷은 빗방울에 번들거렸지만, 얼굴에는 피로와 좌절감이 역력했다.
“상황이 심각한 듯 보이는군요, 발레리우스 대장.”
시온은 그의 시선을 피해 저택의 정문 위에 새겨진 고대 마법 문양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이 문양은 외부인의 무단 침입을 막는 강력한 방어 마법이었다. 어떤 마법사도 이 봉인을 깨뜨리지 않고는 함부로 들어설 수 없을 터였다.
“그렇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전하의 어떤 어명보다도 난해한 사건일 것입니다. 맹세코, 제 평생 이런 기묘한 일은 처음 겪습니다!” 발레리우스 대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오후 내내 저희 근위대원 수십 명이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습니다. 심지어 마법부의 정령술사들도 불러 보았지만…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습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내부는 장엄했지만, 비통함과 혼란의 기운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 바닥에 깔린 융단, 심지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 한 톨까지도 놓치지 않고 훑어보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평범한 것을 지나쳐 그 너머에 숨겨진 진실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로웠다.
“피해자는 카엘렌 경이시죠?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개인 서재에서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서재는 저택의 가장 안전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창문은 두터운 달빛석으로 단단히 막혀 있고, 문은… 외부에서는 도저히 열 수 없는 특수 잠금장치와 함께 카엘렌 경 본인만이 해제할 수 있는 강력한 마법 봉인으로 잠겨 있었습니다.”
발레리우스 대장은 시온을 따라 저택의 중앙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삐걱이는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러운 대리석 계단이었다.
“카엘렌 경은 학계의 거두이자 마법 유물 전문가셨습니다. 그 서재에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진귀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기에, 경은 그 어떤 곳보다 서재의 보안에 신경을 쓰셨습니다.”
드디어 서재 앞에 다다랐다. 두꺼운 오크나무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위로는 복잡한 마법 문양이 빛을 잃은 채 새겨져 있었고, 손잡이 부분에는 어둠의 기운이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근위대원 몇 명이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이 문을 열 때도 애를 먹었습니다. 결국 마법부의 봉인 해제 전문가가 한 시간 넘게 매달린 후에야 겨우 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저희가 본 것은… 끔찍했습니다.”
발레리우스 대장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갈라졌다. 시온은 문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그의 손바닥을 스쳤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그곳에서, 시온은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마법 봉인의 잔흔과… 옅은 비명 같은 것을 감지하는 듯했다. 마치 영혼의 마지막 울림처럼.
“들어가 보시죠, 시온 님. 하지만…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발레리우스 대장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짙게 깔린 서재의 내부가 드러났다. 안에서는 스산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서재 안은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책장들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낡은 양피지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방 한가운데, 푹신한 벨벳 의자에 기댄 채 카엘렌 경이 앉아 있었다.
“젠장… 볼 때마다 역겹군.”
근위대원 한 명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온은 서서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다른 근위대원들처럼 시신에 고정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방 전체를 천천히 훑었다. 책장, 탁자, 램프, 바닥의 융단… 그리고 창문.
창문은 과연 발레리우스 대장의 말대로 두꺼운 달빛석으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틈새 하나 없이 벽과 완벽하게 일체화되어 있었고, 그 위에 새겨진 방어 마법진은 마치 살아있는 듯 희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어떤 물리적 침입도 불가능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문. 문은 안쪽에서 걸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그 위로는 마법 봉인의 흔적이 선명했다. 내부에서 잠긴 문을 외부에서 깨뜨려 들어왔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외부 침입의 흔적도 없었다. 마치 카엘렌 경이 스스로 문을 잠그고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시온의 시선이 마침내 카엘렌 경의 시신에 닿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는 끔찍하게도 목이 뒤로 꺾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고, 입은 벌어져 마치 마지막 비명을 지르다 굳어버린 듯했다. 멱살이 잡힌 흔적이나 몸싸움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깔끔하게, 그러나 잔인하게 살해당한 모습이었다.
“사인(死因)은 질식사로 보입니다. 목에 뚜렷한 압박 흔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레리우스 대장이 덧붙였다.
“그럼 범인은 어떻게 나갔다는 말입니까? 마법부의 봉인 해제 전문가가 한 시간 넘게 매달려야 했던 봉인을… 범인은 단숨에 풀어버리고 사라졌다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근위대원 한 명이 분통 터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그게 문제다!” 발레리우스 대장이 답답한 듯 벽을 주먹으로 쳤다. “서재는 완벽한 밀실입니다. 어떤 통로도, 어떤 틈도 없습니다. 창문은 밖에서 볼 때 단단한 달빛석 벽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지금 유령을 잡으려 하는 꼴입니다, 시온 님.”
시온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카엘렌 경의 시신 주위를 돌았다. 그의 시선은 예리하게 바닥을 훑었다. 먼지 한 톨, 융단의 실밥 하나까지도 그의 눈을 피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문득 멈췄다.
카엘렌 경의 발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융단 위에, 아주 미세한 얼룩이 있었다. 육안으로는 거의 식별 불가능한, 마치 흙먼지 같기도 하고, 미세한 광물 가루 같기도 한 그런 얼룩이었다.
“이것은… 무엇이죠?”
시온의 손가락이 바닥의 얼룩을 가리켰다. 발레리우스 대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런… 얼룩은 처음 보는데. 어쩌면 카엘렌 경께서 서재에서 늘 하시던 유물 세척 작업 중 생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대장님, 워낙 희귀한 재료들을 많이 다루셨으니…” 근위대원 한 명이 추측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발레리우스 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성분은 마법부 감식반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온의 표정은 변함없이 차분했다. 그는 얼룩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조용히 읊조렸다.
“흙먼지는 아닙니다. 그리고 유물 세척에 사용되는 일반적인 광물 가루도 아니군요.”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공간 전체에 흐르는 미세한 기류, 혹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잔향을 느끼려는 듯.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다시 떠올랐을 때, 그 안에는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 얼룩은… 이곳의 것이 아닙니다.” 시온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발레리우스 대장의 심장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온 것처럼 이질적입니다.”
발레리우스 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차원이라니요? 시온 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범인이 공간 이동 마법사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시온은 발레리우스 대장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서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천장의 화려한 석조 장식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어떠한 틈도, 어떤 균열도 없었다. 완벽하게 봉인된 공간.
하지만 시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조롱의 미소가 아니라, 마치 복잡한 퍼즐의 첫 조각을 찾아낸 탐정의 희열과 같은 것이었다.
“밀실 살인… 완벽한 트릭. 아니, 완벽해 보이는 트릭. 그러나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요.”
그는 천천히 카엘렌 경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죽음의 냉기가 그의 얼굴을 스쳤지만, 시온은 흔들림 없었다. 그의 손이 카엘렌 경의 목에 남은 압박 흔적 위를 스쳤다. 섬세한 손가락 끝에서 미약한 마법의 기운이 감지되는 듯했다.
“이건 단순한 목 조름이 아닙니다, 대장님.” 시온이 나직이 말했다. “이곳에선… 아주 오래된 마법의 흔적이 느껴지는군요.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끌어당기기 위한* 흔적입니다.”
발레리우스 대장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등만 바라보았다. 시온의 다음 말은 그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살인, 이 밀실… 사실은 밀실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서재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시온에게로 향했다. 밀실이 아니었다니? 저 완벽하게 봉인된 공간이?
시온은 고개를 들어 근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 속에는 이미 범인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듯했다.
“트릭은… 바로 저 문 안쪽이 아니라… 서재 ‘밖’에 있었습니다.”
그의 말과 함께, 천둥이 저택을 뒤흔들 듯 크게 울려 퍼졌다. 빗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달빛 저택의 그림자는 더욱 깊고 불길해졌다.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