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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속의 유령들 – 3화: 흔들리는 거울**
텅 빈 복도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도시 전체를 집어삼킨 혼돈의 불길은 내 아파트 23층까지는 닿지 못했지만, 그 고요함은 오히려 모든 소음을 증폭시키는 덫처럼 느껴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절규나 짐승 같은 울부짖음은 이미 일상이 된 배경 음악이었다. 진짜 공포는, 그 모든 소리가 사라진 순간에 찾아왔다.
이진우는 식탁 위에 놓인 마지막 남은 통조림을 무감각하게 쳐다봤다. 붉은 빛이 감도는 육즙은 이미 굳어 있었고, 깡통 가장자리에는 녹이 슬어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창문은 두꺼운 커튼과 박스로 가려져 있었고, 현관문은 무거운 철제 선반과 가구들로 이중 삼중 잠겨 있었다. 완벽한 은신처였다. 적어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는.
“젠장….”
메마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텅 빈 공간에 내뱉어진 단어는 어색하게 울렸다. 벽에 기댄 채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시계는 한참 전에 멈췄고, 휴대폰은 배터리가 방전된 지 오래였다. 시간의 감각은 희미해졌고, 오직 해가 뜨고 지는 흐릿한 변화만이 하루가 흘렀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이 어둠 속에서 나는 몇 주, 아니 몇 달을 버텨왔을까.
그때였다. 거실 한쪽 구석, 커다란 전신 거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살짝 흔들렸다.
이진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숨을 멈추고 거울을 응시했다. 착각일까. 며칠 밤낮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버티고 있으니, 환영이라도 보는 걸까.
그러나 거울은 다시 한번 ‘끼이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하게. 마치 누군가 뒤에서 흔든 것처럼.
이진우는 바짝 마른 침을 삼켰다. “누구… 누구 있어요?”
목소리가 쥐어짜듯이 나왔다. 손에 쥐고 있던 식칼의 손잡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불안정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왔다. 바깥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 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만난 적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니. 아니,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 아파트에서, 나 혼자만이 숨 쉬고 있을 터였다.
식칼을 든 채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발걸음마다 바닥의 나무 마루가 삐걱거렸다. 복도 끝, 현관문 너머에서 끔찍한 울부짖음이 들려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예상 가능한 공포는 대비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침묵 속에서 알 수 없는 존재가 움직이는 소리는 차가운 칼날이 등줄기를 훑는 것 같았다.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흔들림은 멈춰 있었다. 낡은 원목 프레임의 거울은 아무런 변화 없이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초췌하고, 수척해진 남자의 얼굴. 겁에 질린 눈동자.
“아무것도 아니야… 착각이야.”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중얼거렸다.
그 순간, 주방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진우의 몸이 경직됐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번엔 확실했다. 명확하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마치 컵이 바닥에 떨어져 깨진 것 같은.
그는 식칼을 앞으로 내세우며 주방으로 향했다. 심장이 발밑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주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산산조각 난 유리컵 조각들이었다. 어제 분명히 설거지를 마치고 식기 건조대에 걸어두었던 컵이었다.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위치였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이진우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주방의 좁은 공간을 미친 듯이 살폈다. 찬장 문이 열려있었고, 내용물이 어지럽게 쏟아져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흔적은 너무나 선명했다.
“나와! 당장 나와!” 그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마치 차가운 손이 목덜미를 스친 것 같은 섬뜩한 감각이었다. 이진우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휙 뒤를 돌아봤다.
거실이었다. 거실 한가운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가족사진 액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액자 유리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 위에는, 흐릿한 손자국 같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검붉은, 오래된 피처럼 보이는 자국이었다.
이진우는 뒷걸음질 쳤다. 숨이 턱 막혔다. 이 아파트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도. 그럼 이 손자국은… 누구의 것인가.
그때, 다시 거실 쪽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강해졌다. 마치 무언가 불쾌한 존재가 리듬을 타며 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꺼져…! 제발… 꺼져!”
그는 무릎을 꿇고 식칼을 든 채 울부짖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차갑게 식어갔다. 바깥의 좀비들은 피할 수라도 있었다. 하지만 이 보이지 않는 존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아파트 자체가 무덤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툭… 툭… 투둑!’
이번에는 천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마치 윗집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아니, 윗집이 아니라, 바로 내 머리 위에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계속됐다. 점점 더 크게, 점점 더 가깝게. 마치 무언가가 천장 속에서 기어 다니는 듯한 끔찍한 상상까지 들었다.
갑자기, 거실의 전등이 ‘깜빡’ 하더니 완전히 꺼졌다.
순식간에 찾아온 암흑. 완벽한 어둠 속에서, 이진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혼란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그는 무언가 차가운 것이 자신의 발목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축축한, 그리고 기분 나쁜 감촉.
“흐읍…!”
이진우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발목을 스친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그의 다리를 감는 듯했다.
공포가 심장을 옥죄었다. 무언가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내 발밑에서.
“아… 안돼…!”
그는 발버둥 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은 이미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않았다. 발목을 감싼 무언가는 점점 더 조여왔다. 그리고 그 순간, 귓가에 차가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찾… 았다…”
어린아이의 목소리 같기도, 늙은 여인의 목소리 같기도 한 섬뜩한 속삭임이었다. 이진우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필사적으로 식칼을 휘둘렀다. 텅 빈 어둠 속에서, 무엇을 향해 휘두르는지도 모르는 채.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발목을 감싸던 것이 스르륵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스르륵…’ 하는 소리가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이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실의 전등이 다시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마침내, 희미한 불빛이 다시 거실을 비췄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파트의 모든 가구가 제자리를 벗어나 뒤집히고 깨져 있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액자는 박살 났고, 소파는 찢겨 있었으며, 책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힘이 이곳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테이블이 있던 자리에.
누군가 알 수 없는 액체로 바닥에 커다란 글씨를 그려 놓았다. 검붉고 끈적거리는 액체. 그 글씨는 마치 어린아이가 서투르게 쓴 것 같았다.
**「나. 가. 지. 마.」**
이진우는 그 글씨를 보며 얼어붙었다. 이 모든 일이…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가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내가 이곳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식칼을 든 그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이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내가 숨어들어온 곳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어쩌면… 좀비 떼 한가운데 던져지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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