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균열 (The Crack)**
“쿵!” 하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서 벌어졌던 일이 아직도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식탁 위를 굴러다니던 컵이, 마치 누군가 내던지기라도 한 듯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을 때, 지혁은 자신이 환각을 보는 것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깨진 유리 조각들은 바닥에 생생히 흩뿌려져 있었고, 그 차가운 파편들이 그의 발밑에서 기분 나쁘게 빛나고 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그의 삶은 지극히 평범했다. 회사, 퇴근, 저녁 식사, 웹 서핑, 수면. 반복되는 일상.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처음에는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려 있다거나, 분명히 잠근 현관문이 다시 열려 있는 것 같은 기시감. 작은 물건들이 제자리를 벗어나 있는 일. ‘내가 요즘 정신이 없나?’ 하고 넘겼다.
하지만 현상은 점점 대담해졌다. 한밤중에 울리는 알 수 없는 발소리, 아무도 없는 방에서 들리는 속삭임, 잠결에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손길. 그리고 오늘, 컵이 부서졌다. 그것은 더 이상 착각으로 치부할 수 없는 명백한 물리적 간섭이었다.
지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식탁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아파트가, 아니, 이 공간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명확한 경고였다. 그는 두려웠다. 너무나 두려웠다. 공포가 그의 목을 죄어오는 듯했다.
“젠장… 이건 말도 안 돼….”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가늘고 떨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은 벽에 걸린 시계의 희미한 초록빛만이 존재를 알릴 뿐, 모든 사물이 숨죽인 듯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지혁의 심장을 더욱 거세게 때렸다. 침묵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풍 전야 같았다.
그때였다. 거실 한쪽, 벽을 장식하던 오래된 가족사진 액자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지혁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었다. 액자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흔들림 없이 수평을 잃더니, 이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서 떨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유리는 깨지지 않았지만, 그 광경은 지혁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명백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 넓은 아파트에 혼자였다.
지혁은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성이 본능적인 공포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주소록을 뒤졌다. 수현. 그래, 수현이라면. 그녀는 그를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말해야 했다. 이 미쳐버린 현실을.
“여보세요?”
수현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자, 지혁은 순간 안도감에 눈물이 핑 돌 뻔했다.
“수현아… 나야, 지혁.”
“어, 지혁이? 웬일이야. 이 시간에.”
“나… 나 좀… 나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
지혁은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을 느꼈다.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무슨 일인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수현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났다.
“집에서… 집에서 이상한 일이 생겨. 계속. 나 지금 너무 무서워.”
지혁은 컵이 깨진 일, 사진 액자가 떨어진 일, 그리고 그 전의 모든 기이한 현상들을 서둘러 설명했다. 수현은 처음에는 침묵했고,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혁아… 너 혹시 많이 피곤한 거 아니야? 스트레스가 심해서… 헛것이 보이거나 들릴 수도 있어.”
“아니! 아니라고! 그게 아니야! 내가 지금… 지금도 방금 액자가 떨어지는 걸 봤어. 눈앞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도 들었다고!” 지혁은 울부짖듯 말했다.
수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지혁은 그녀가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할까 봐 두려웠다.
“알았어, 알았어. 일단 진정해. 너무 불안하면 내가 지금이라도 가줄까? 밤이 너무 늦었는데….”
“아니,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아… 모르겠어. 그냥… 그냥 내 말 좀 믿어줘. 나 진짜 무섭다고.”
수현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지혁아. 내가 널 안 믿는 게 아니야. 다만, 좀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바람이 불거나, 건물이 오래돼서….”
“새 아파트야! 고층이라 바람도 없어! 그리고 그게 물건을 움직이게 하고, 속삭이게 해? 내 뒤에서 숨 쉬는 소리가 나게 해?”
지혁은 결국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의 말은 논리적이지 못했고, 감정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성과 공포의 경계선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알겠어. 지혁아. 너무 무서우면 오늘은 그냥 불 다 켜놓고 자. 아니면, 이대로 날이 밝을 때까지 나랑 통화하고 있을까?” 수현의 목소리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괜찮아. 내가… 내가 어떻게든 해봐야겠어.” 지혁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뭘 어떻게 해? 괜히 위험한 짓 하지 말고!”
“몰라. 그냥… 그냥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끊어.”
지혁은 수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차가운 결의가 솟아났다. 이대로 공포에 떨며 살 수는 없었다. 그는 이 미지의 존재와 맞서야 했다. 혹은 최소한, 그 정체를 파악해야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액자를 주워 들었다.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사진 속,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이들은 이 공간의 그림자를 알지 못할 터였다.
지혁은 천천히 부엌으로 향했다. 서랍을 열고 식칼을 꺼냈다.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손에 전해졌다. 이 칼로 뭘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어떤 형태로든 대비하고 싶었을 뿐이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기 위한 미약한 시도였다.
거실로 돌아온 지혁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배회했다. 이제 모든 것이 수상하게 느껴졌다. 벽의 무늬, 가구의 그림자, 심지어 천장의 미세한 균열까지도.
“너….”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단호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침묵. 깊고, 짙은 침묵이 답했다.
그는 칼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해 위협이라도 하듯이.
그 순간,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창밖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아닌, 분명히 건물 내부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듯한 기분 나쁜 떨림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다시 한번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번에는 아예 벽에서 떨어져 그대로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났다. 시계의 배터리가 튕겨져 나갔고, 부서진 틈 사이로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번뜩였다.
지혁은 비틀거렸다. 마치 누군가 그의 뒤에서 강하게 밀친 것 같았다. 그는 균형을 잃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가 넘어진 순간, 방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식탁 의자가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내며 거실 한가운데로 끌려갔다.
그리고, 식탁 의자 뒤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하지만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형체는 있었지만, 마치 수많은 어둠의 조각들이 합쳐진 것처럼 일렁였다. 사람의 형태를 닮았지만, 팔과 다리의 비율은 기괴했고, 머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텅 빈 구멍이 검은 심연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존재 자체가 공간을 비틀어놓는 듯한 형상이었다.
지혁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입에서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식칼을 든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그림자가, 일렁이는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손가락 없는 손이, 지혁을 향해 천천히 뻗어왔다.
아파트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완벽한 암흑 속에서, 지혁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의 차가운 숨결을 느꼈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