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2층, 유리(Yuri)의 작은 방은 언제나 그랬듯 미지근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밖은 이미 어스름이 짙게 깔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피어오르는 시간.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 댁에 가신다고 어제 저녁부터 집을 비웠고, 유리는 딱히 심심할 틈도 없이 평소처럼 침대에 대자로 뻗어 휴대폰 화면 속 세상에 빠져 있었다.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만이 고요한 아파트에 유일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그때였다.
‘팟.’
거실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다. 유리는 이어폰 한쪽을 빼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옆집 소리인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이어폰을 꽂으려는 순간, 이번에는 ‘찌직… 탁!’ 하는 좀 더 선명한 소리가 들렸다.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유리는 휴대폰을 침대 옆에 던져두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 벌써 오셨나?”
시계를 보니 밤 9시. 이 시간에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는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어두웠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실루엣을 그렸다.
“아무도 없네.”
유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거실 불을 켰다. 거실은 어수선했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다만, 창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었는지 희미한 외풍이 느껴졌다. “창문 단속 좀 잘 하지….” 유리는 투덜거리며 창문을 닫으려고 다가갔다. 그 순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도자기로 된 작은 화분 하나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정말 아주 조금, 미세하게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유리는 눈을 비볐다. ‘내가 너무 피곤한가? 환영인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지만, 화분은 처음의 위치에서 살짝 비껴나 있었다. 털이 쭈뼛 섰다. 괜히 오싹한 기분에 얼른 창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하하, 뭐, 바람이 센가 보지.”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목이 말랐다.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들고 컵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싱크대 위 선반에서 유리컵 하나가 저절로 툭, 떨어졌다. ‘쨍그랑!’ 굉음과 함께 컵은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건 바람 때문도, 피곤해서 보는 환영도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
“누구… 누구세요?”
말소리는 거의 기어들어 가는 수준이었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공포가 온몸을 짓눌러왔다. 유리는 뒷걸음질 치며 거실로 나왔다. 그때였다. 꺼져 있던 TV가 갑자기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켜졌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백색 노이즈 화면. 그리고 화면은 채널을 미친 듯이 돌리기 시작했다. 1번, 2번, 3번… 순식간에 수십 개의 채널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끄, 꺼져!”
유리는 비명을 지르며 리모컨을 찾았지만, 리모컨은 소파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버린 뒤였다. TV는 여전히 지직거렸고, 그 소리는 유리의 귓속을 파고들며 고막을 찢을 듯 울려댔다.
그 순간, 유리는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기울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기울어진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액자를 잡아 비틀듯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액자가 벽에서 떨어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악!”
유리는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 현관문이 갑자기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저절로 닫히더니 ‘철컥’ 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잠겼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유리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가지 마.”
귓가에 마치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러나 분명히 들리는 속삭임이 들렸다. 낮은, 쉰 목소리. 유리는 숨을 헐떡였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거실의 모든 가구들이 제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소파가 혼자 움직여서 테이블에 부딪히고, 의자가 쓰러지며 쿵 소리를 냈다. 장식장 위의 작은 물건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났다. 이건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건… 악의였다. 명백한 악의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유리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문을 닫으려 했지만, 문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버티는 듯 닫히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밀어 넣고 문을 발로 막으려 했지만, 이내 문이 활짝 열리더니 안방에 있던 스탠드가 통째로 날아와 유리의 옆을 스치고 벽에 부딪혔다.
‘콰앙!’
유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서웠다. 너무나도.
그때, 방 구석에 놓여 있던 그녀의 작은 화장대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무서운 속도로 그녀에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피할 틈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유리의 심장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았다.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내가…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내면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따뜻하고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자, 날아오던 화장대는 그 자리에서 멈칫하더니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빛은 유리의 몸을 감싸 안았고, 그녀의 평범한 잠옷은 눈 깜짝할 새에 순백의 드레스와 은빛 갑옷으로 변했다. 가슴 중앙에는 영롱한 보석이 박혀 있었고, 손에는 작은 지팡이가 저절로 쥐여졌다. 머리카락은 길게 흩날리며 빛을 머금었고, 눈빛은 더 이상 공포에 질려 있지 않았다.
경외로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온몸을 휘감았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뭐야…?”
낯선 자신의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 그녀의 눈앞에 흐릿하게 존재하던 악의의 기운이 더욱 강렬하게 꿈틀거렸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존재가 아니었다. 온 아파트를 채우고 있던 어둠의 기운이 마치 하나의 형태로 뭉쳐지려는 듯, 거대한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감히… 내 공간을… 침범하다니….”
유리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이전의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단호하고, 위엄 있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보석이 빛을 발했다.
“돌아가!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유리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지팡이 끝에서 눈부신 빛의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어둠의 기운을 향해 쇄도했고, 어둠은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날카롭고 섬뜩한 소리가 아파트 전체를 울렸다.
빛과 어둠의 충돌은 거실의 모든 물건들을 휩쓸었다. 날아다니던 가구들이 다시금 제자리에 박히고, 깨졌던 액자는 원래대로 돌아오는 듯했다. 어둠은 빛의 공격에 밀려 후퇴하는 듯 보였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치 깊은 바닥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그림자처럼, 아파트의 벽과 바닥 속으로 스며들며 자취를 감췄다.
모든 것이 잦아들자, 유리의 몸을 감싸던 빛이 서서히 꺼졌다. 드레스는 다시 잠옷으로, 지팡이는 사라지고, 보석은 사라졌다. 유리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휘청거렸다.
“하아… 하아….”
다시금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위는 아수라장이었다. 깨진 유리 파편, 엉망진창이 된 가구들, 바닥에 흩뿌려진 물건들. 그러나 그녀가 처음 보았던 공포스러운 모습보다는 조금은 정돈되어 있었다. 스탠드는 벽에 박힌 채 간신히 매달려 있었고, 화장대는 부서진 채 바닥에 있었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희미하게 빛이 남아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내가… 뭘 한 거지…?”
유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엉망이 된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기묘한 빛,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휘두른 강력한 힘.
이 모든 것이 단지 꿈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희미한 잔광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알 수 없는 힘이 다시 필요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또한 함께였다. 이 밤은 시작에 불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