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낙원의 숨결

손끝에 닿는 차가운 쇠붙이 감각이 지혁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무너진 빌딩의 잔해 속에서 겨우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식기였다. 녹슨 숟가락 하나가, 한때 풍요로웠던 문명의 흔적임을 잊지 말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지혁은 흙먼지 낀 손으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깨진 손잡이, 검게 변색된 몸체. 쓸모는 없었다. 그저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여전히, 감상에 젖을 여유 따위는 사치였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잿빛이었다. 멸망의 날 이후, 푸른 하늘은 전설 속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간혹 구름 한 점 없는 날이 찾아오면, 지독한 모래폭풍이 몰아치거나, 태양의 잔해가 붉게 타오르는 기현상만이 이어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지혁은 낡은 방독면의 정화통을 만지작거리며 부서진 고층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희미한 태양열로 겨우 작동하는 탐지기가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근처에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젠장, 또.”

낮은 욕설이 방독면 속에서 맴돌았다. 인간의 흔적은 아니었다. 이런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지혁처럼 숨어 지내거나, 아니면 무리를 지어 끔찍한 방법으로 서로를 약탈하며 살아갈 뿐이었다. 탐지기가 감지한 건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강하며, 훨씬 잔혹한 존재들—변이체—이었다.

지혁은 허리춤의 나이프를 고쳐 잡았다. 탄약은 귀했고, 화기는 항상 위험했다. 소리 없이 움직이며 급소에 정확히 나이프를 꽂는 것이 그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는 숨을 죽였다. 오래된 본능이 경고했다. 일반적인 변이체가 아니었다. 탐지기의 파동이 이상할 정도로 섬세했다.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변이체들과는 다른, 정돈된 움직임.

무너진 백화점 잔해 속, 한때 빛나던 명품관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마네킹 조각상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 사이로 무언가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지혁은 벽에 바싹 붙어 숨을 죽였다. 그리고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에 가까웠다.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 그러나 피부는 햇빛 한 점 없는 깊은 동굴 속에서나 볼 법한 창백한 푸른빛을 띠었고, 손가락 끝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칼은 마치 살아있는 덩굴처럼 등 뒤로 길게 뻗어 있었고,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눈이었다. 핏빛처럼 붉게 빛나는, 그러나 너무나도 깊고 지적인 눈동자가 폐허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듯, 혹은 모든 것을 비웃는 듯한 시선이었다.

‘변이된 인간인가? 아니면….’

지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그가 상대했던 변이체들은 짐승에 가까웠다. 날카로운 이빨, 찢어진 피부, 무자비한 공격성. 하지만 저 존재는 달랐다. 우아하고, 고요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 존재는 멈춰 서서 바닥에 떨어진 낡은 사진첩을 굽어보았다. 사진첩 속에는 멸망 이전의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행복한 얼굴들. 그 존재는 손을 뻗어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 손가락 끝의 날카로운 발톱이 사진을 찢을 듯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찰나의 순간, 그 존재의 붉은 눈동자가 지혁이 숨어 있는 방향을 향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들켰다.

지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엄폐물 뒤로 숨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그 존재는 그의 존재를 인지했다. 놈이라면, 아니 그녀라면—지혁은 무의식중에 그 존재를 ‘그녀’라고 불렀다—지금 당장 달려들어 그의 목을 찢어버릴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지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여전히 사진첩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표정함 속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 인간에게서는 보기 힘들었던,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지혁에게 향했다. 이제는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붉은 눈동자에는 어떠한 적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사진첩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지혁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지혁은 긴장으로 온몸이 굳었다. 나이프를 뽑아 들고 자세를 취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창백한 푸른 피부가 희미한 빛을 받아 기묘하게 빛났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방독면을 쓰고 있는 지혁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도망쳐. 저건 괴물이야. 가까이 오지 마!

하지만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방독면에 닿았다. 차갑고, 부드러웠다. 날카로운 발톱은 그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았다. 그저 지혁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차가운 보호구를 조심스럽게 더듬을 뿐이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지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그 눈빛 속에 소용돌이쳤다. 슬픔, 호기심, 그리고… 갈망?

그 순간, 멀리서 굉음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소리였다. 다른 변이체들이었다. 무리를 지어 사냥에 나선 굶주린 괴물들.

그녀의 몸이 순간 경직됐다. 붉은 눈동자에 경고등이 스쳤다. 그녀는 지혁에게서 손을 거두고,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혁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끝에 남아있는 방독면의 차가운 감촉, 그리고 그녀의 부드러웠던 터치. 그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그녀는 그를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에게 어떤 경고를 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

굉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혁은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녀의 붉은 눈동자와 창백한 푸른 피부만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멸망 이후, 인간에게 금지된 존재. 그와의 만남은 생존자에게 곧 죽음과 같았다. 하지만 지혁은 알았다. 그는 방금, 무언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 마주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운명은, 어쩌면 그의 유일한 생존 이유를 뒤흔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잿빛 하늘 아래 홀로 남겨진 멸망의 도시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황량한 삶에 드리운 금지된 빛의 그림자를 느꼈다. 그 그림자는 차갑고 위험했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