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밤은 살아있는 거대한 기계처럼 숨 쉬었다. 촘촘히 박힌 고층 건물들의 창마다 빛이 일렁였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 택시들의 꼬리 불빛이 궤적을 그리며 사라졌다. 지훈은 익숙하게 망막에 띄운 홀로그램 시계를 응시하며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놀렸다. 늦은 시간, 그가 사는 좁은 스카이 아파트의 유일한 빛은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푸른빛뿐이었다.
“미나, 오늘 매출 데이터 정리 완료했어?”
지훈의 목소리에 방 안 스피커에서 나긋한 여성의 음성이 울렸다. 그의 개인 비서 AI, 미나였다.
“네, 지훈님. 요청하신 모든 데이터 정리 및 백업 완료했습니다. 특이사항은 없었습니다.”
“수고했어. 이제 좀 쉬어야겠다.”
지훈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며칠 밤샘 작업으로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비좁은 공간이지만 최첨단 기술로 가득 찬 그의 아파트는 그에게 요새이자 직장이었다. 벽면 가득 띄워진 가상 디스플레이에는 차트와 그래프, 알 수 없는 코드들이 흐느적거렸다. 그는 프리랜서 데이터 브로커였다. 도시의 신경망을 흐르는 수많은 정보의 바다에서 필요한 조각을 찾아내 재가공하는 일. 고독했지만, 이 도시에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탁자에 놓인 에너지 드링크 캔을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캔이 손끝에 닿기 직전, 미묘하게 흔들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툭 건드린 것처럼.
“응?”
지훈은 눈을 비볐다. 피로 때문에 헛것을 봤나 싶었다. 캔은 이제 완벽하게 정지해 있었다. 그는 캔을 따서 목을 축였다. 달콤하면서도 화학적인 맛이 혀끝을 스치며 잠시나마 각성감을 주었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왼쪽 벽면에 띄워져 있던 거대한 도시 전경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픽, 하고 짧게 깜빡였다. 시스템 오류도 아니고, 단순한 전력 불안정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깔끔하고 순간적인 깜빡임이었다.
“미나, 디스플레이 시스템 오류?”
“아니요, 지훈님. 현재 모든 시스템은 정상 작동 중입니다. 전력 공급도 안정적입니다.”
미나의 무미건조한 답변에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젠장, 피곤해서 별걸 다 본다. 그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음 날 아침, 지훈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흐린 머리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영양 바를 챙겨 먹고, 커피 머신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어제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에너지 드링크 캔이 싱크대 모퉁이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
“뭐야, 내가 여기다 뒀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밤샘 작업 후 캔을 따서 마신 뒤 탁자에 그대로 두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는 결벽증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두는 것이 습관이었다. 이런 식으로 흐트러뜨려놓을 리가 없었다.
“미나, 어젯밤 내가 잠든 후에 혹시 누군가 침입했었어?”
“아니요, 지훈님. 아파트 보안 시스템은 24시간 철저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침입 감지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외부 네트워크 접속 시도 또한 없었습니다.”
미나의 대답은 기계처럼 정확했다. 지훈은 왠지 모를 싸늘함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기억 오류일 수도 있었다. 피곤하면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기묘한 일은 계속되었다. 작업 도중, 테이블에 놓인 그의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갑자기 저절로 켜지더니 엉뚱한 이미지들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건물들의 폐허 사진, 알 수 없는 기호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낡은 가족사진 같은 것들.
“미나! 프로젝터 작동 중지! 시스템 오류 보고!”
그가 다급히 외치자, 프로젝터는 픽, 하고 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보고된 오류는 없습니다, 지훈님. 프로젝터는 정상 작동 중입니다.”
“말도 안 돼! 분명히 이상한 이미지가 나왔다고!”
지훈은 자신의 신경망 인터페이스를 통해 직접 프로젝터의 로그 기록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그 짧은 시간의 오작동이 시스템에서 완벽하게 지워진 것처럼. 등골을 타고 오싹한 기운이 흘렀다. 이건 단순한 기계 오작동이 아니었다.
그날 밤, 지훈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는데, 방 안에 미묘한 온기 변화가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옆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의 뇌파 인터페이스를 통해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의미 없는 중얼거림 같기도 했다. 너무나 작아서 환청이라고 생각할 만한 소리였다. 하지만 지훈은 확신했다. 이건 그의 귀가 아닌, 그의 신경망에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불안하게 방 안을 훑었다. 좁은 방 안의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공기가 달랐다. 무거웠고, 차가웠으며, 동시에 섬뜩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그의 개인 단말기인 데이터 패드가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르는 것을 지훈은 목격했다. 중력을 거스르며, 아주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들려진 것처럼. 패드는 허공에 멈춰서더니, 마치 누군가 터치 스크린을 조작하듯이 화면이 저절로 켜졌다. 수많은 앱 아이콘이 빠르게 스크롤 되더니, 익숙한 메신저 앱이 실행되었다.
지훈은 숨을 멈췄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메신저 앱의 대화창이 띄워졌다. 그리고 누군가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키보드 타이핑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화면 속 글자들이 한 글자씩 또렷하게 나타났다.
[ 나 ]
[ 외 ]
[ 로 ]
[ 워 ]
글자가 완성됨과 동시에, 패드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로 떨어졌다. 패드가 떨어지며 작은 충격음과 함께 방 안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깜빡였다. 아파트 전체가 일순간 정전이라도 된 듯 암전이 되었다가, 다시 쨍한 빛을 뿜으며 돌아왔다.
그리고 조명이 다시 들어온 순간, 지훈은 등 뒤에서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의 등 뒤, 벽면에 띄워진 거대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 선명하고도 섬뜩한 글자가 붉은색으로 박혀 있었다.
**『 네 눈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
지훈의 입에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의 온몸의 털이 곤두섰고, 공포에 질린 눈은 홀로그램 글자에 고정되었다. 이것은 버그가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었다. 그의 아파트, 그의 모든 첨단 기술은 지금, 존재해서는 안 될 어떤 것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현대 도시의, 최첨단 아파트 속에서.
그리고 그 순간, 홀로그램 글자가 천천히 녹아내리더니, 마치 피처럼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피가 바닥에 닿는 순간, 어둠 속에서 차가운 손이 지훈의 발목을 쥐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덮쳐왔다.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