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스튜디오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심의 빛 공해 속에서도, 지혜는 희미하게 빛나는 몇몇 별들을 찾아내곤 했다. 마치 존재를 잊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듯한 작은 불씨들처럼. 그리고 그 불씨들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도 그녀의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왔다.
별이 흐르는 밤
밤 10시 정각, 시그널 음악이 잔잔하게 깔리고 지혜의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안녕하세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지혜입니다. 한 주의 시작, 월요일 밤입니다. 여러분의 오늘 밤하늘은 어떤가요? 저의 이곳은 여전히 빌딩 숲의 불빛이 별빛을 삼키고 있지만,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여러분의 별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답니다.”
늘 그렇듯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였지만, 오늘은 어딘가 모르게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지난주에 도착한 한 통의 사연 때문이었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정성스러운 편지였다. 발신인은 ‘별똥별 추억’.
지혜는 서랍 속 편지를 잠시 떠올렸다. 익숙한 듯 낯선 글씨체. 그리고 편지 속 문장 하나하나에 깃든 그리움의 무게. 그녀는 애써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곡을 소개했다. “오늘 첫 곡은, 별똥별 추억 님께서 신청해주신 곡입니다. 어린 시절, 가장 빛나던 별 아래서 잃어버린 약속을 찾아 헤매는 모든 이를 위해 바친다는 이 곡, 들려드릴게요. 김동률의 ‘다시 시작해보자’입니다.”
음악이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지혜는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귀를 기울였다.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칼날처럼 심장을 파고들었다. ‘다시 시작해보자, 그 별이 지기 전에…’. 마치 그 별똥별 추억이라는 분이 자신의 오랜 비밀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어릴 적, 오리온자리 아래에서
지혜는 눈을 감았다. 음악은 끝나고 광고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의식은 저 먼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열두 살 여름,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할머니 댁 마당. 모기가 앵앵거렸지만 상관없었다. 그 밤하늘은 도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보석 같은 풍경이었다.
“지혜야, 저기 보여? 저기 삐딱하게 서 있는 별 세 개가 허리띠 같지? 저게 오리온자리야.”
옆에 누워 있던 동혁이 손가락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동혁은 지혜보다 한 살 많았고, 도시에서 방학을 맞아 할머니 댁에 내려온 지혜에게는 유일한 친구이자 별 선생님이었다. 그는 항상 별이 쏟아지는 밤에 지혜를 마당으로 불러내 알 수 없는 별자리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정말? 신기하다. 그럼 저 별들도 다 이야기가 있는 거야?”
“그럼! 세상 모든 별에는 이야기가 있어.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는 이 별빛들도, 아주 오래전에 시작된 빛이 여기까지 도착한 거래.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보는 별은 아주 먼 옛날의 별인 거지.”
동혁의 말은 어린 지혜에게는 너무나도 신비롭게 들렸다. 먼 과거의 빛.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 그는 항상 손수 만든 낡은 별자리 지도를 보여주며 지혜에게 별의 언어를 가르쳤다.
“지혜야, 나중에 어른이 되면, 우리 둘이서 저 은하수를 따라가는 여행을 하자. 내가 다 가르쳐줄게, 모든 별들의 비밀을.”
그 말을 하던 동혁의 눈은 오리온자리만큼이나 반짝였다. 그리고 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아무도 모르게, 오직 밤하늘 아래 둘만의 비밀로.
하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 해 여름, 지혜가 할머니 댁을 다시 찾았을 때, 동혁의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동혁은 도시로 돌아가버린 뒤였다. 주소도, 연락처도 몰랐다. 어린 지혜는 매일 밤 마당에 누워 오리온자리를 올려다보며 동혁의 이름을 불렀지만, 메아리 없는 밤하늘만이 그녀의 질문을 삼킬 뿐이었다.
그렇게, 오리온자리는 지혜에게 약속의 별이자, 상실의 별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후로도 별이 빛나는 밤이면, 문득 동혁의 환한 눈빛과 그날의 약속을 떠올리곤 했다.
편지 속의 별
광고가 끝나고 지혜는 다시 마이크 앞에 앉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가슴속에서는 격렬한 파도가 일렁였다.
“네, 김동률 씨의 ‘다시 시작해보자’ 들으셨습니다. 가사가 참 먹먹하죠. 별똥별 추억 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잠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지혜님, 저는 어린 시절, 소중한 약속을 밤하늘에 묻어두고 온 사람입니다. 그 약속을 함께 나누었던 이는 이제 어디에 있을까요. 혹시 지혜님도 저처럼, 잃어버린 별을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낡은 별자리 지도를 보며, 언젠가 그 별이 다시 제 길을 찾아 돌아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 밤, 오리온자리가 유난히 선명하네요.’”
지혜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낡은 별자리 지도’라는 구절. 그리고 ‘오리온자리’.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섬뜩한 일치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설마 그일까? 스쳐 지나가는 상념들을 애써 억누르며, 지혜는 다음 곡을 소개했다. “별똥별 추억 님을 위한 두 번째 곡입니다. 윤하의 ‘별에서 온 그대’입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지혜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별똥별 추억’이라는 닉네임. 어릴 적의 추억. 그리고 결정적인 ‘오리온자리’와 ‘낡은 별자리 지도’.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지냈던, 아니 잊으려 애썼던 그 이름, 동혁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방송을 마친 뒤, 지혜는 스튜디오를 나섰다. 평소 같으면 후련했을 발걸음이 오늘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문득 비상구 계단 쪽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그는 창문 밖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혜는 멈춰 섰다. 어두운 복도였지만, 희미하게 비춰지는 달빛 아래 그의 옆얼굴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낡아 보이는 종이 한 장. 그 종이의 한쪽 모서리가 살짝 접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희미하게 별들이 그려져 있는 듯했다.
남자는 그녀가 다가서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하늘의 어떤 표식을 찾고 있는 사람처럼. 지혜는 홀린 듯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이 혹시, 그 별똥별 추억이냐고. 당신이 혹시,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냐고.
그 순간,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이 지혜를 향했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는, 깊고 아련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지혜는 그 눈빛 속에서, 어린 시절 오리온자리 아래서 반짝이던 동혁의 눈빛을 발견했다.
남자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아주 작고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지혜는 숨을 멈췄다. 그녀의 눈에도, 마치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아련한 빛이 차올랐다. 십수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두 개의 별이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