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림대회 – 제칠화: 검은 그림자, 푸른 번개
웅장한 천룡전(天龍殿)의 거대한 투기장. 수만 명의 인파가 뿜어내는 열기는 대기를 뜨겁게 달구었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긴장감이 돌을 깎아 만든 좌석마다 스며들어 있었다. 대회는 이미 중반을 넘어섰고, 각 문파의 최고 고수들이 차례로 격돌하며 무림 전체를 경악과 환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결승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준결승전. 그 중에서도 가장 이목이 쏠린 대결이 지금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다음 대국! 청운파의 청운 대협과 흑영문의 흑영 낭자입니다!”
투기장 중앙을 지키고 선 백발의 심판관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다음 대전자를 호명했다. 그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투기장은 순간적으로 정적에 휩싸였다가 이내 거대한 폭풍처럼 터져 나오는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관중석 저 멀리, 오대세가의 문주들이 앉아있는 귀빈석에서도 웅성거림이 일었다.
“드디어 저 둘이 붙는군. 청운의 검술은 이미 천하에 그 이름을 떨쳤으나, 흑영 낭자는… 그 정체가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아.” 무당파의 장문인, 진천궁(震天弓)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옆에 앉은 소림사의 방장, 혜각(慧覺) 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고 좌선 자세를 취한 채 입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그림자는 본디 그 뿌리가 깊은 법. 흑영 낭자의 기운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소이다.”
환호성이 잦아들 무렵, 투기장 동쪽 입구에서 한 줄기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우와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이 다시금 귓가를 때렸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검은 머리카락, 푸른색 비단 도포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청년이 담담한 표정으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그의 허리춤에는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은 보검, ‘청룡검(靑龍劍)’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바로 청운파의 신성, ‘벽력검(霹靂劍)’ 청운이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지만, 내면에는 거대한 폭풍이 일렁이는 듯했다. 지난 몇 년간, 그는 무림의 신성으로 떠오르며 수많은 강자들을 쓰러뜨렸다. 그의 검은 번개처럼 빠르고, 하늘의 뜻처럼 냉정했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달랐다. 그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청운이 투기장 중앙에 서자마자, 서쪽 입구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저것이…!”
환호성은 이내 잦아들고, 투기장 전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환호성보다 더욱 큰 긴장감을 머금고 있었다.
검은 천으로 얼굴 전체를 가린 흑영(黑影). 그녀의 전신을 감싼 검은 도포는 어둠 그 자체인 듯 빛을 삼키는 듯했다. 등 뒤에는 아무런 무기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 존재만으로도 날카로운 칼날처럼 주변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땅을 스쳤고, 마치 환영처럼 빠르게 청운의 맞은편에 섰다.
심판관이 잠시 흑영을 주시했다. 그녀의 내공은 너무나도 깊어 마치 심연처럼 느껴졌다. 그의 노련한 눈으로도 감히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두 분, 준비되셨습니까?” 심판관의 목소리가 굳건하게 울렸다.
청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영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어둠의 조각상 같았다.
“그럼… 대국을 시작한다!”
심판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투기장 전체가 다시 한번 거대한 침묵 속에 잠겼다. 수만 명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이 대결이 천하의 운명을 가를 것이라는, 묘한 예감이 모두의 마음속을 스치고 있었다.
**스릉!**
청운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청룡검으로 향했고,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푸른 검날이 차가운 빛을 토해내며 검집에서 튀어나왔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푸른색 기운이 용솟음쳤다. 청운파의 ‘벽력검법(霹靂劍法)’ 초식, ‘청룡출해(靑龍出海)’!
거대한 푸른 용 한 마리가 바다를 박차고 솟아오르는 듯한 기세로, 청운은 흑영에게 직진했다. 검 끝에는 강렬한 푸른 번개가 서려 있었고, 그 속도는 눈으로 쫓기 어려울 정도였다. 단 한 걸음에 수십 척을 주파하며 흑영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러나 흑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는 듯 보이지 않았다. 청운의 검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찰나, 그녀의 몸이 마치 물거품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허억!” 여기저기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청운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푸른 번개가 섬광처럼 잔상만을 남겼다. 그의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그녀는 어디에?
바로 그때, 청운의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검을 휘둘렀다. **챙!** 금속성의 날카로운 마찰음이 투기장을 가로질렀다.
검은 도포 자락 사이로 섬광처럼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짧은 비수였다. 흑영은 손가락보다 약간 긴 비수 두 자루를 쥐고 있었다. 그녀의 비수는 청운의 청룡검과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고, 그 충격은 청운의 손목을 저리게 만들었다. 흑영의 완력은 가녀린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엄청났다.
“빠르다…! 저것이 흑영문의 ‘유영무형공(幽影無形功)’인가!” 귀빈석에서 한 문주가 탄성을 질렀다.
유영무형공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적의 시야를 현혹하고, 예측 불가능한 공격을 가하는 흑영문의 비전 무공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실체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흑영은 청운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마치 춤을 추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스쳐 지나갈 때마다 검은 그림자가 여러 개로 나뉘어 청운의 주위를 에워쌌다.
청운은 검을 휘둘러 그림자들을 찢어발겼으나, 그것은 그저 허상일 뿐이었다. 진짜 흑영은 그림자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예측 불가능한 각도에서 비수를 날렸다.
**촤아악! 챙! 스윽!**
공기가 찢어지고,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무했다.
청운은 전신에 푸른 기운을 둘러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그의 검은 그림자 속에서 진짜를 찾아내려 애썼다. 흑영의 공격은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여 들어왔고, 단 한순간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크으읍…!”
청운의 왼쪽 어깨에 차가운 감각이 스쳤다. 날카로운 비수가 그의 도포를 찢고 피부를 살짝 베어냈다. 푸른 도포가 붉은 핏자국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유효타였다.
청운은 고통에도 아랑곳 않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림자에 현혹되지 마라. 진정한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 법.’ 그의 스승이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는 검 끝을 땅에 박고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청각과 기감(氣感)에 집중했다. 수많은 그림자들의 움직임 속에서, 아주 미세한 기운의 흐름, 아주 작은 바람의 갈라짐. 그것을 찾으려 했다.
“젠장, 저자는 대체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저리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한 관중이 초조하게 외쳤다.
귀빈석에서도 혜각 스님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청운 대협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오. 허나, 저 그림자를 꿰뚫어 볼 수 있을지는….”
흑영은 청운의 행동에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청운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림자들이 다시 한번 청운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더욱 빠르고, 더욱 교묘하게.
청운은 눈을 감은 채였다. 그의 주변에서 푸른 기운이 더욱 강렬하게 휘몰아쳤다. 땅에 박힌 청룡검에서부터 푸른 번개가 치솟아 올라 그의 전신을 감쌌다.
**파지직!**
번개가 일어나는 소리가 투기장을 울렸다.
흑영의 그림자들이 청운에게 닿으려는 순간, 청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잡았다…!”
그는 왼손을 흑영의 그림자 무리 중 한 곳으로 뻗었다. 그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번개처럼 뻗어나가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그림자 무리 중 한 곳에서 ‘끼이익’하는 미세한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법처럼, 모든 그림자가 사라졌다. 청운의 손이 움켜쥔 곳에 흑영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의 비수가 청운의 심장을 향해 뻗어 있었으나, 그의 눈빛이 워낙 강렬하여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힌 듯 멈칫하는 듯 보였다.
“놀랍군…! 유영무형공을 저리 꿰뚫다니!”
진천궁 장문인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흑영의 눈빛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청운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번개의 기운이 그녀의 심장을 조여왔다. 그녀는 후퇴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벽력검법… 비검(秘劍)!” 청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의 손이 다시 한번 청룡검을 움켜쥐었다. 검 끝에서 푸른 번개가 격렬하게 휘몰아쳤다. 투기장의 대기가 번개로 가득 차오르는 듯했다.
“푸른 번개 일섬!”
**콰아아앙!**
청운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한 한 번의 찌르기였으나, 그 속도와 위력은 천둥 번개가 대지를 뒤흔드는 것과 같았다. 푸른 번개가 용처럼 흑영을 향해 쇄도했다.
흑영은 눈을 가린 천 너머로도 분명히 그 위력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녀는 두 자루의 비수를 교차시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온몸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마치 검은 비늘처럼 그녀를 감쌌다. 흑영문의 최종 방어술, ‘흑련환골갑(黑蓮幻骨甲)’!
푸른 번개와 검은 기운이 격돌하는 순간, 투기장 전체가 눈이 부실 정도의 섬광과 귀청을 찢는 굉음으로 뒤덮였다. 천룡전의 거대한 지붕이 흔들리고, 관중들은 모두 눈을 가린 채 몸을 웅크렸다. 대지가 갈라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 투기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섬광이 사라지고 굉음이 잦아들자, 사람들은 천천히 눈을 떴다. 투기장 중앙은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 깊게 패여 있었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침묵.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결과를 기다렸다.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두 명의 인영이 어렴풋이 보였다.
한 명은 여전히 서 있었다. 청운이었다. 그의 청룡검은 아직도 푸른빛을 희미하게 내뿜고 있었으나, 그의 도포는 찢기고 곳곳에 피가 배어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겨우 검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흑영은 쓰러져 있었다.
검은 도포는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그녀를 감쌌던 검은 기운은 산산이 부서진 듯했다. 그녀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관중석에서는 깊은 한숨과 함께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이겼다…! 청운 대협이 이겼어!”
그러나 청운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그는 땀과 피로 얼룩진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흑영에게 닿았다.
그때, 쓰러진 흑영의 손에서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청운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흑영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검은 비수 한 자루였다.
그리고 그 비수 끝에서, 아주 희미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흑영문의 금지된 독술, ‘무영신독(無影神毒)’의 기운이었다.
청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이긴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함정에 빠진 것인가?
무림의 운명이 걸린 이 대회는, 아직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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