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숨소리가 메아리치는 콕핏 안, 강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피로가 쌓인 육신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지만, 그의 의지는 강철보다 단단했다. 거대한 메카닉 ‘야차’의 시커먼 기체는 어둠 속에 잠긴 도시의 잔해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도시 전체가 잿빛 폐허로 변한 지 수년. 이제 이곳은 오직 복수만을 쫓는 망령들의 놀이터였다.
“목표 지점까지 1.2km. 적성 반응은 현재 없음.”
기계음이 무심하게 강현의 귓전을 때렸다. 무심하지만, 그 음성 너머에 도사린 고요한 위험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재하. 그 이름 세 글자가 그의 심장을 날카로운 칼날처럼 후벼 팠다. 가장 믿었던 친구. 함께 꿈을 꾸고, 같은 설계도 위에 미래를 그렸던 동지.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는 잔혹한 진실만이 남았다. 그의 배신으로 강현은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 동료, 그리고 평생을 바쳤던 연구마저도.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복수뿐이었다.
야차의 거대한 다리가 무너진 고층 빌딩의 잔해를 밟고 지나갈 때마다, 둔탁한 진동이 콕핏까지 전해졌다. 야차는 강현의 분노 그 자체였다. 거친 외형 속에 숨겨진 최첨단 기술과 무자비한 전투력.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의 복수심이 야차의 모든 시스템을 깨어나게 했다.
그때, 시야의 가장자리에 섬광이 스쳤다.
“경고! 적성 메카닉 세 기 접근 중! 분류: 흑표범 개량형.”
빌딩 사이에서 검은 그림자 셋이 튀어나왔다. 재하가 이끄는 ‘창세기회’의 주력 기체 중 하나인 흑표범이었다. 전신을 검은색 장갑으로 두른 맹수형 메카닉은 네 발로 지면을 박차며 야차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의 속도는 놀라웠다.
“젠장, 벌써 눈치챘나.” 강현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야차의 주먹에서 에너지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붉은 섬광이 번뜩이는 야차의 주먹은 단순한 타격 무기가 아니었다. 강현이 직접 개발한 ‘광륜’ 시스템은 근접 전투 시 충격파를 발생시켜 적의 장갑을 파괴하는 동시에 내부 시스템에 과부하를 일으키는 치명적인 무기였다.
첫 번째 흑표범이 맹렬하게 달려들며 발톱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공중을 갈랐다. 강현은 야차를 능숙하게 조종해 공격을 회피하고, 동시에 오른쪽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앙!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흑표범의 가슴팍에 야차의 주먹이 강타했다. 광륜 시스템이 작동하며 붉은 충격파가 터져 나갔다. 흑표범의 장갑이 찌그러지고, 시스템 과부하 경고음이 울렸다. 하지만 흑표범은 쓰러지지 않았다. 개량형은 확실히 강했다. 조종사는 숙련된 듯, 재빨리 자세를 회복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이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 강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야차의 등에서 숨겨져 있던 보조 날개 ‘어둠의 날개’가 펼쳐졌다. 단순한 날개가 아니었다. 비행은 물론, 고속 이동 시 잔상을 만들어 적의 조준을 흐트러트리는 기만 장치이자, 동시에 추가적인 에너지 출력을 제공하는 장치였다. 야차가 순간적으로 가속하며 첫 번째 흑표범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쿠구궁!
야차의 왼쪽 다리에 장착된 대형 칼날, ‘참마도’가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흑표범의 장갑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다. 내부의 전선들이 끊어지고 스파크가 튀었다. 기체가 휘청이며 균형을 잃었다.
그 틈을 타 두 번째 흑표범이 야차의 후미를 노렸다. 하지만 강현은 이미 그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야차의 어둠의 날개가 전개되며 기체를 급선회시켰다. 날개 끝에서 방출된 고에너지 입자가 두 번째 흑표범의 센서에 직격했다.
“젠장, 시야 확보!” 조종사의 다급한 외침이 야차의 통신망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
시야를 잃은 흑표범이 허공에 대고 발포했지만, 강현의 야차는 이미 그들의 사거리 밖이었다. 야차는 다시 자세를 잡고, 이번에는 두 번째 흑표범을 향해 돌진했다. 강력한 광륜 주먹과 참마도의 연계 공격. 방어할 틈도 주지 않는 무자비한 공세에 두 번째 흑표범은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잔해로 변한 흑표범.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한 기. 마지막 흑표범 조종사는 동료들의 처참한 최후를 보고 잠시 주춤했다. 그 망설임이 그의 패인이었다.
“네놈들에겐 망설일 자격조차 없다.” 강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야차의 전신에서 검은색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강현은 야차의 ‘폭주 모드’를 활성화시켰다. 이 모드는 야차의 모든 성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지만, 조종사에게 막대한 부하를 주는 위험한 기술이었다. 강현의 콧잔등에서 땀방울이 맺히고, 관자놀이의 혈관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복수만을 향해 타올랐다.
마지막 흑표범이 뒤늦게 도주하려 했지만, 야차는 이미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폭주 모드의 야차는 압도적인 속도로 흑표범을 추격했고, 이내 따라잡았다.
콰지직! 쿵!
이번에는 광륜 주먹이 흑표범의 머리 부분을 강타했다. 머리에서 시작된 균열이 전신으로 퍼져나갔고, 이내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세 기의 흑표범이 순식간에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강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폭주 모드의 후유증이 온몸을 덮쳐왔지만, 그의 시선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적들의 파편 너머, 희미하게 빛나는 목표 지점을 응시했다. 창세기회의 데이터 코어가 보관된 지하 시설. 그곳에 재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을 터였다.
“재하… 네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듯이, 나도 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것이다.”
그때, 야차의 통신망에서 익숙하지만 혐오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하고 냉정했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비웃음이 배어 있었다.
“꽤 흥미로운 쇼군. 여전히 거칠고, 여전히 멍청하군, 강현.”
강현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재하의 목소리였다.
“네놈…!”
“네가 여기까지 올 줄은 알았어. 그래서 준비했지. 네가 가장 싫어하는 방법으로 말이야.”
통신이 끊겼다. 동시에 야차의 센서가 거대한 에너지 반응을 감지했다. 지상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기체의 그림자. 재하의 새로운 기체, ‘세라핌’이었다. 순백의 장갑과 거대한 날개를 가진 세라핌은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타락한 천사처럼.
“드디어 나타났군… 재하.”
강현은 야차의 콕핏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분노, 증오,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그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복수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 하지만 재하의 세라핌은 이전에 상대했던 어떤 기체보다도 강력해 보였다.
야차의 검은 날개가 바람을 가르고, 강현의 시선은 세라핌의 번쩍이는 코어에 고정되었다. 이젠 피할 수 없는 결전이었다.
“이번엔 네 차례다, 재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