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찢을 듯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미나의 손에 들린 낡은 횃불이 흐릿한 빛을 뿌렸지만, 지하 깊은 곳에서 풍겨오는 습하고 축축한 기운을 완전히 물리치지는 못했다. 방금 전 발견한 오래된 석판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와 함께, 거대한 원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준은 석판에 손을 짚고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정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마을의 가장 깊은 곳, 이 오래된 등대 아래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니…”
미나의 눈은 석판 중앙에 새겨진 거대한 문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대한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그 문양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체념의 감정을 동시에 담고 있는 듯했다. 주변의 상형문자들은 마치 울부짖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고, 그 중 몇몇 단어는 어렴바리 해석될 것 같았다. ‘희생의 달’, ‘잊힌 자의 울음’, ‘봉인된 심장’…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때였다. 횃불의 희미한 빛마저 가를 듯,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낮게 울리는 웅장한 진동이 느껴졌다. 벽에 금이 가는 소리가 났고, 천장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미나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움직이는, 섬뜩한 한기였다.
“무슨 소리지? 지진인가?” 준이 황급히 미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또 다시 진동이 이어졌다. 그러나 미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석판의 문양에 박혀 있었다. 문양 속 거대한 눈동자에서,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 순간, 등대 밖에서부터 마을을 뒤덮고 있는 안개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하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오는 듯한 안개의 눅진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깥세상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미나와 준은 서둘러 좁은 통로를 통해 등대 위로 향했다.
등대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두 사람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마을을 뒤덮은 안개는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전에는 그저 고요하고 신비로운 풍경이었던 안개가, 이제는 거대한 파도처럼 마을을 집어삼키려 들고 있었다. 회색빛 장막은 모든 것을 가리고, 오직 눈앞의 몇 걸음만을 허락했다.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비쳐오는 마을의 불빛들은 마치 심해 속 고립된 등대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알 수 없는 형체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건… 보통 안개가 아니야.” 미나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무언가가… 오고 있어.”
“촌장님에게 가야 해. 어쩌면 촌장님이 알고 계실지도 몰라.” 준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두 사람은 안개를 헤치고 촌장님의 집으로 향했다. 발밑의 자갈길은 안개에 젖어 미끄러웠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음산하게 들렸다.
가려진 진실의 조각들
촌장님의 집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준의 손길이 거칠었다. 한참 만에 문이 열렸고, 야윈 촌장님의 얼굴이 촛불 그림자 아래 더욱 늙고 초췌해 보였다. 촌장님은 미나와 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결국… 너희도 그곳을 찾았구나.” 촌장님의 목소리는 몹시 지쳐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아이가 너희를 그곳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지.”
“무슨 말씀이세요, 촌장님? 지하에서 발견한 석판에 ‘희생의 달’이니 ‘잊힌 자의 울음’이니 하는 글이 쓰여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 이 안개는… 평범하지 않아요!” 미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준은 촌장님의 얼굴에 드리워진 깊은 그림자를 보며 불안감에 휩싸였다.
촌장님은 두 사람을 안으로 들이고는, 벽난로 앞에 앉아 한참을 침묵했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만이 적막을 갈랐다. 이윽고 촌장님이 입을 열었다.
“우리 마을에는 아주 오래된 전설이 있다. 너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된 이야기지. 이 안개 낀 호수 마을은… 사실 커다란 희생 위에 세워진 곳이야.”
촌장님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먼 옛날, 이 마을은 지독한 역병과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때, 한 강력한 영혼,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가 나타나 스스로 호수 깊은 곳에 봉인되었다는 것이다. 그 영혼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재앙을 막고, 마을을 안개 속에 숨겨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했다. 촌장님은 그것을 ‘약속된 봉인’이라고 불렀다.
“그럼 이 안개가… 그 수호신의 힘이었다는 말인가요?” 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 안개는 수호신의 눈물이자, 마을을 감싸는 장막이었다. 하지만 영원할 수는 없는 법. 봉인된 힘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약해졌고, ‘희생의 달’이라 불리는 특정 주기에 맞춰 그 힘을 다시 채워줘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마을의 장로들만이 대대로 알고 지켜온 비밀 의식이었지.”
“그럼 그 ‘잊힌 자의 울음’은요? 지하 석판에 그 글귀가 있었어요!” 미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촌장님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수호신이 봉인하면서 함께 가두었던 존재다. 재앙의 근원, 혹은 그것의 일부. 수호신의 힘이 약해질 때마다, 잊힌 자가 봉인 속에서 깨어나려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 울음은 절망을 불러오고, 안개를 집어삼키려 한다. 마치 지금처럼…”
촌장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비명 같은 바람 소리가 집 밖에서 울려 퍼졌다. 창문이 덜그럭거렸고, 닫힌 문틈으로 희뿌연 안개 가닥들이 스며들어왔다.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움직이는 안개는 집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차갑게 만들었다.
“지금… 지금이 바로 ‘희생의 달’의 시작이다. 그리고 봉인이… 완전히 깨지려 하고 있어.” 촌장님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의식을 미뤄왔어. 마을 사람들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진실을 외면했지. 이제 잊힌 자가 완전히 깨어나면… 마을은 재앙에 휩싸일 것이다.”
미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개는 이제 집 안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비명에 가까운 낮고 깊은 울림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수만 명의 영혼이 한꺼번에 절규하는 듯한,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분노의 소리였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것은 ‘잊힌 자의 울음’이었다.
촌장님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낡고 빛바랜 천 조각이 들려 있었다. 천 조각에는 석판에서 본 것과 같은 문양이 희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남아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시 봉인을 강화할 방법… 등대 지하의 그 석판이 바로 봉인의 핵심이다. 하지만… 지금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야. 수호신의 심장이 될… ‘그것’이 필요하다.”
촌장님의 시선이 미나에게 향했다. 미나는 등대 지하에서 보았던 희미한 빛이 자신의 심장에서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녀는 온몸으로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숙명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그 순간, 촌장님의 몸이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그의 손에서 낡은 천 조각이 떨어져 내렸고, 미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주워 들었다. 천 조각에서 풍겨오는 희미한 향기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촌장님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듯, 간신히 속삭였다.
“네가… 해야 한다. 너만이…”
촌장님의 의식은 점차 멀어져 갔다. 안개는 이제 집 안으로 거침없이 밀려들어와 모든 것을 뒤덮으려 했다. 잊힌 자의 울음은 더욱 커져갔고, 마을 전체를 집어삼킬 듯 포효했다. 미나는 손에 든 천 조각과, 눈앞에 쓰러진 촌장님, 그리고 창밖의 맹렬한 안개를 번갈아 보았다. 이 모든 재앙의 한가운데, 그녀가 서 있었다.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그녀의 심장이 불안과 공포로 격렬하게 요동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