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색 낙원
### 1장: 폐허 속 한 걸음
흐린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건물들이 잿빛 뼈대처럼 솟아 있었다. 한때는 번화했던 도로 위에는 콘크리트 조각과 뒤틀린 철근, 이름 모를 잡초들이 뒤섞여 거대한 야생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위로 옅은 바람이 쓸고 지나갈 때마다 삭아버린 철골들이 기괴한 비명처럼 울렸다.
강하준은 낡은 방수포로 얼기설기 덧댄 배낭을 고쳐 메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신발 밑창에 닿는 자갈들의 감촉, 주변의 모든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예민하게 빛나고 있었다. 햇수로 따지면 스무 해가 넘는 시간을 이런 풍경 속에서 살아왔다. 세상이 ‘붕괴’라고 불렀던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에게 세상은 항상 이랬다. 폐허와 생존의 연속.
“또 헛걸음인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지 못했다. 등허리에 매달린 식량 주머니는 이미 비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건 곰팡이 핀 건빵 조각 두 개와 녹슨 캔에 담긴 정체불명의 수프였다. 오늘은 운이 좋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과거의 기록에서 ‘대형 상점’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지만, 여전히 다른 곳보다 식료품을 찾을 확률이 높았다. 특히 깊숙한 곳은 아직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니,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운 곳이어야만 했다.
무너진 다리 기둥을 지나, 버려진 차량의 잔해를 넘어갔다. 곳곳에 스치듯 보이는 낙서와 표식들은 다른 생존자들의 흔적이었다. 대부분은 위협적인 경고나 영역 표시였고, 간혹 도움을 바라는 절박한 메시지들도 보였다. 하준은 그런 것들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 메시지에 귀 기울이다간 제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테니까.
한참을 더 걸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웅장했던 입구는 거대한 구멍처럼 뚫려 있었고, 앙상한 철근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유리창은 산산조각 나거나 통째로 뜯겨 나간 지 오래였다. 건물 내부에서 스며 나오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입구에서부터 안쪽을 천천히 훑었다. 이곳은 이미 여러 번 털린 흔적이 역력했다. 바닥에는 찢어진 포장지, 긁어모은 듯한 캔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천장은 곳곳이 무너져 내려 햇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고, 그 빛줄기 속에서 먼지가 끊임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빌어먹을.”
하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전등을 꺼내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아주 작은 구석이라도 남아 있을지 몰랐다.
가장 먼저 식료품 코너로 향했다. 진열대는 이미 텅 비어 있었고,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잔해들만이 이곳의 처참했던 마지막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가장 깊숙한 곳, 천장이 무너져 내린 뒤편 창고 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다른 이들이 접근하기 더 어려웠을 것이다.
무너진 벽돌과 부식된 선반들을 겨우 비집고 들어간 창고 안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어두웠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마다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쥐들의 배설물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빛을 천천히 움직였다.
“음?”
낡은 선반 가장 안쪽, 무너진 천장 파편들 사이에 무언가가 보였다. 먼지와 흙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분명 금속 재질의 캔들이었다. 하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은 언제나 절망의 끝자락에서 찾아오는 법이었다.
조심스럽게 잔해들을 걷어냈다. 캔들은 총 네 개였다. 녹이 슬어 있었지만, 부풀어 오르거나 터진 흔적은 없었다. 라벨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지만,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으레 그랬듯이, 무엇이 들어있을지는 개봉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테지만. 고기 통조림일 수도, 콩 통조림일 수도, 아니면 그냥 물이 들어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 폐허에서는 귀한 식량이었다.
캔들을 주머니에 챙기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의 발밑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쿵.*
하준은 순간 얼어붙었다. 쥐의 움직임과는 달랐다. 쥐가 저런 소리를 낼 리 없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손전등 불빛을 급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렸다.
빛이 닿은 곳은 창고 가장 안쪽의 어둠이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거대하고 불분명한 형체. 사람의 형상은 아니었다. 기괴하게 굴곡진 등뼈와 비정상적으로 긴 팔다리, 그리고 섬뜩하게 번들거리는 눈.
‘변형체…!’
숨이 턱 막혔다. 이 폐허에 숨어사는 괴물들. ‘붕괴’ 이후 나타났다고 알려진 이 생명체들은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과 강한 공격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생존자들의 가장 큰 위협이었다. 하준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크르르륵…*
낮게 깔리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변형체는 빛을 싫어하는 듯, 빛이 닿자 잠시 움찔거렸지만 이내 섬뜩한 속도로 하준에게 다가왔다.
“젠장!”
하준은 재빨리 몸을 돌려왔던 길을 되짚어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발아래 무너진 잔해들이 거친 소리를 내며 밟혔다. 뒤에서 변형체의 날카로운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 거친 숨소리가 쫓아왔다.
좁은 틈새를 겨우 빠져나와 텅 빈 식료품 코너로 다시 나왔다. 아직 건물 밖은 멀었다. 변형체는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붙었다. 하준은 주변의 널브러진 선반 잔해를 발로 차 넘어뜨리며 도망쳤다. 거대한 선반이 쓰러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고, 잠시 변형체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하준은 전력 질주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폐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문득 그의 뇌리에 스쳤다. 오늘 발견한 캔 4개. 이 모든 고통과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살아야 했다. 무엇이 들어있든, 그 캔들은 그에게 하루를 더 살아갈 힘을 줄 것이었다.
마침내, 건물의 뚫린 입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희미한 햇빛이 마치 구원의 빛처럼 느껴졌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철컥!*
그의 등 뒤에서 둔탁한 금속음이 들렸다. 변형체가 쓰러진 선반 잔해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었다. 잠시의 유예였다. 하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폐허 골목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한참을 그렇게 가파른 숨을 내쉬며 심장을 진정시켰다. 손에 땀이 흥건했지만, 그의 손은 캔 4개를 꽉 쥐고 있었다.
“후우… 망할… 놈들.”
간신히 숨을 고른 하준은 배낭을 벗어 캔을 더 안전한 곳에 넣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잿빛 구름이 잔뜩 낀 흐린 하늘. 하지만 오늘 밤은 빈손이 아니었다.
생존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한 발짝 내딛고, 살아남고, 다음 발걸음을 계획하는 것. 오늘은 어쨌든 성공이었다. 하지만 내일은 또 어떤 위협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 폐허의 세상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자신만의 생존 지도를 따라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폐허 속 한 걸음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