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마지막으로 푸른색을 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빛깔을 떠올리려 애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지는 지독한 세상이었다. 현우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밟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삭막한 바람이 텅 빈 창문 구멍들을 휘돌아나가며 음산한 울음을 토해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낮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이내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한 손에 녹슨 철근을 쥔 채, 다른 손으로는 낡은 배낭의 어깨끈을 고쳐 맸다. 벌써 사흘째였다. 입에 넣을 만한 것이라고는 지독한 쓴맛이 나는 정화수로 겨우 연명하는 중이었다. 며칠 전 발견한 말라비틀어진 통조림 한 조각이 마지막 보급품이었다.
원래는 슈퍼마켓이었을 자리. 이제는 벽이 허물어지고 천장이 내려앉아 폐허나 다름없었다. 선반은 죄다 털려나간 지 오래고, 바닥에는 깨진 유리 파편과 썩은 쓰레기만이 뒹굴었다. 현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잔해 틈새를 꼼꼼히 살폈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허무함과 공복감만 더욱 선명해질 뿐.
그때였다.
삭막한 침묵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현우의 귓전을 때렸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 동시에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한.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무너진 벽 뒤로 숨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일반적인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과 공포, 그리고 어딘가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기괴한 음색이 뒤섞인 소리였다.
현우는 숨을 죽인 채 소리가 들려온 쪽을 응시했다. 멀리 떨어진 건물의 옥상에서였다. 희미한 먼지 너머로 어른거리는 그림자. 불분명했지만, 여러 개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 사이에, 기형적으로 길고 검은 촉수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마치 거대한 해파리가 공중을 유영하는 듯한 섬뜩한 움직임이었다.
‘또 저것들인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 존재들은 이 세상이 망가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나타났다. 처음에는 환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들은 실재하는 공포가 되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 거대한 불청객들은 인간의 상식을 비웃듯 기괴한 형태로 나타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었다. 감히 그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인간의 정신은 산산조각 났으니까.
현우는 천천히 몸을 틀어 그곳에서 멀어졌다. 비명소리가 멎었다. 그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비명은 살아있다는 증거였고, 멎었다는 것은… 더는 없다는 의미였다.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공포가 목구멍을 조여왔지만, 이내 분노와 체념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는 폐허가 된 도시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어딘가에 있을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 물, 음식, 그리고 잠시나마 안전할 수 있는 은신처. 이 세 가지가 생존의 전부였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사치이자 환상에 불과했다.
점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해는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잿빛 하늘에는 불길한 붉은빛이 감돌았다. 마치 거대한 눈꺼풀 없는 눈이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기괴한 하늘이었다.
“하아… 오늘 밤은 어디서 보내나.”
현우는 텅 빈 건물 숲 속에서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건물의 지하실이라면, 그나마 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밤이 되면 기온은 뼈아프게 내려갔고, 그림자 속에서 꿈틀거리는 존재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한참을 헤매던 그는 마침내 한 지하 주차장을 발견했다. 입구는 낡은 철문으로 막혀 있었지만, 한쪽이 찌그러져 틈새가 생겨 있었다. 현우는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내부는 암흑 그 자체였다. 후각을 자극하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축축한 곰팡이 냄새. 현우는 배낭에서 낡은 랜턴을 꺼내 불을 밝혔다. 희미한 불빛이 어둠을 찢고 나아가자, 녹슨 차들의 잔해와 함께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좋아… 이 정도면.”
일단 안전한 공간을 확보했다는 안도감에 현우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벽에 기대앉아 몸을 웅크렸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의 감촉이 고스란히 등에 와닿았다. 주머니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정화수 한 모금을 꺼내 목을 축였다. 혀끝에서 맴도는 쓴맛이 생존의 씁쓸한 현실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그때, 랜턴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현우의 눈이 날카롭게 그곳을 향했다. 혹시나 하는 긴장감에 철근을 움켜쥐었다.
천천히 랜턴을 움직이자, 빛이 닿는 곳에 그것이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낡은 수첩.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지만, 겉표지에 희미하게 ‘생존 일지’라는 글자가 보였다. 현우는 망설임 없이 수첩을 집어 들었다. 혹시라도 이곳을 지나간 다른 생존자가 남긴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첫 장을 펼쳤다. 낡고 바스락거리는 종이 위로 희미한 글씨가 나타났다.
[20XX년 X월 X일. 날씨 흐림.
여전히 혼자다. 어제 간신히 깡통 두 개를 찾았지만, 하나는 이미 부패해 있었다. 젠장. 물은 더 부족하다. 비가 내리지 않아. 하늘은 늘 잿빛이다. 푸른색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가끔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본다. 이상한 기호들. 그것들은 마치…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친 소리겠지. 이대로 가다가는 나도 미쳐버릴 거다.
오늘은 도시 북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낮게 울리는, 마치 심장 박동 같은 소리. 땅이 흔들리는 듯했다. 나는 숨어서 그 소리가 멎기를 기다렸다. 그 무엇도 보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아.
아직 살아있다. 겨우. 이것을 기록하는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남기고 싶다.]
현우는 다음 장을 넘겼다. 글씨는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알아보기 힘든 그림과 함께 찢겨진 글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림이… 움직여. 벽에서… 기어 나와. 그 눈… 수많은 눈이 날 보고 있어. 소리가… 멈추지 않아. 귓속에서… 속삭여. 저들의 언어…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 고통…]
그리고 그 아래에는, 마치 손톱으로 긁어낸 듯한 기괴한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무수히 많은 눈이 달린 촉수 같은 형체.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오늘 낮에 옥상에서 본, 바로 그 ‘존재’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섬뜩한 전율이 현우의 몸을 휩쓸었다. 일기장의 주인은 아마도 이 주차장에서 밤을 보내다가… 그것들과 마주쳤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는 수첩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좁은 공간에, 자신과 함께 그 존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한 기분이었다. 랜턴 불빛이 흔들리자, 그림자들이 벽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 마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현우는 녹슨 철근을 꽉 움켜쥐었다. 오늘 밤은 길고, 지독할 것 같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는 또다시 내일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 잔혹한 세상에서 부여된 유일한 존재 이유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