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잿빛 도시의 숨결**
쉭, 쉭, 쉭.
산성비가 눅눅한 공기를 찢으며 강철 구조물 위로 쏟아져 내렸다. 회색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빌딩들의 앙상한 뼈대가 지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폐기된 차량들이 거대한 고철 더미를 이루고, 그 사이사이에 기형적으로 자라난 이끼와 곰팡이가 검붉은 점액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제이의 손에 들린 탐색기가 미약한 진동을 울렸다.
“여기야. 신호가 더 강해졌어.”
제이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히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낮게 깔려 있었다. 방수 처리된 후드 아래로 차가운 빗방울이 스며들었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없이 굳건했다. 낡은 방진 마스크 너머로 칙칙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부식된 금속과 썩은 유기물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제이 형, 얼마나 더 가야 해요? 너무 추워요.”
뒤따라오던 루아가 몸을 웅크리며 투덜거렸다. 그녀의 어깨에는 제이보다 작은 배낭이 메어져 있었고, 손에는 녹슨 철근 조각이 쥐여 있었다. 열 살 남짓 어린 나이에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 던져졌음에도, 루아는 놀랍도록 끈기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이 혹독한 환경은 가끔 그녀의 어린 영혼마저 갉아먹곤 했다.
“조금만 더 버텨. 여기가 마지막 희망이야. 기지 전력이 바닥을 보여.”
제이는 대답하며 낡은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디지털 지도는 자잘한 노이즈와 함께 엉성하게 구현되어 있었지만, 목표 지점만은 선명하게 깜빡거렸다. ‘구(舊) 중앙 데이터 허브’. 거대 기업들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던 시절, 도시의 심장부였던 곳. 지금은 거대한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지만, 가끔 운이 좋으면 작동하는 에너지 셀을 건질 수 있었다.
“저기다.”
제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빗물에 쓸려나간 진흙 속에 반쯤 파묻힌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한때 유리로 번쩍였을 외벽은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뼈대만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입구는 무너진 잔해물로 가득했지만, 그 틈새로 겨우 사람이 드나들 만한 구멍이 보였다.
“이런 곳에 누가 먼저 와있지 않았을까요?” 루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무도 없길 바랄 뿐이지.” 제이는 짧게 대답하며 허리춤의 나이프를 만져 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무심하게 칼날을 스쳤다.
구멍을 비집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내부의 공기는 바깥보다 훨씬 더 차갑고 습했다. 흙먼지와 부패한 냄새가 뒤섞여 목을 칼칼하게 만들었다. 제이는 손전등을 꺼내 비추었다. 빛줄기가 닿는 곳마다 부서진 모니터 조각들과 케이블들이 뒤엉켜 있었다. 한때 번성했던 기술의 잔해들이 거대한 무덤처럼 느껴졌다.
“조용히 해. 그리고 내 뒤에 바짝 붙어.”
제이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담겨 있었다. 건물 안은 바깥과 달리 소리가 울렸다. 작은 발소리 하나도 크게 들릴 것 같았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미세한 공기의 흐름 변화를 감지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곳에 있었던 흔적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한때 서버실이었을 법한 공간에 다다랐다. 천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려 바닥에는 흙과 녹슨 철근이 널려 있었지만, 그 가운데 묘하게 정돈된 공간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 폐기된 전선으로 얼기설기 만든 침대, 한쪽 구석에는 캔과 건조 식품 포장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캠프 파이어의 흔적인지 그을음 자국도 선명했다.
“누가 있었나 봐요.” 루아가 속삭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스쳤다.
“최근에.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수도 있어.” 제이는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바닥의 진흙에는 선명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보통의 생존자들 것보다 훨씬 크고, 어딘가 기형적인 모양이었다. 불안감이 제이의 뱃속을 할퀴었다. 이런 곳에서 다른 생존자를 만나는 것은 길거리에서 스캐브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었다. 자원 싸움은 언제나 피를 불렀다.
탐색기가 희미한 진동을 다시 울렸다. 제이는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따라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들의 목표, 고용량 에너지 셀의 신호가 이곳에서 가장 강하게 잡혔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화면에 집중하던 제이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저편 복도 끝,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제이는 본능적으로 루아의 입을 틀어막고, 자신들의 몸을 부서진 서버 랙 뒤로 숨겼다. 철컥, 하는 소리가 그의 귀에 박혔다. 분명 기계음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질질 끄는 발소리. 인간의 것과는 다른, 기계와 살덩이가 뒤섞인 듯한 둔탁한 소리였다.
그림자 속에서 불길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상체, 한쪽 팔에는 망치처럼 변형된 거대한 의수(義手)가 달려 있었다. 다른 한쪽 손에는 녹슨 철제 갈고리가 쥐여 있었다. 얼굴은 투박한 금속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지만, 마스크 틈새로 보이는 눈은 붉은색 사이버 옵틱으로 번쩍였다. 전형적인 하층민 스캐브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개조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광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스캐브는 발소리를 질질 끌며 그들이 숨어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느릿했지만, 끈질겼다. 마스크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제이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루아는 그의 품에 안겨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캐브가 바로 그들의 은신처 옆을 지나쳤다. 제이는 숨을 꾹 참았다. 심장이 쿵, 쿵, 쿵. 마치 뇌를 때리는 듯 격렬하게 울렸다. 놈의 기계 의수가 바로 그들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찰나의 순간, 스캐브가 멈춰 섰다.
제이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놈은 고개를 돌려 그들이 숨어있는 랙을 응시했다. 사이버 옵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랙의 금속 표면을 스쳐 지나갔다. 제이는 망설일 틈도 없이 루아의 손을 잡고 랙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뛰어!”
제이의 짧고 단호한 외침과 동시에 루아는 본능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에 스캐브는 거친 포효를 내질렀다. 망치 의수가 랙을 강타하며 굉음을 울렸다.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제이는 루아를 이끌고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끼이이익, 쿵!
낡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금속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스캐브가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격렬하게 울렸다. 제이는 뒤를 흘깃 보았다. 붉은 점멸광이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왼쪽! 저쪽으로 빠져!”
제이는 통제실로 보이는 공간으로 이어지는 문을 가리켰다. 루아가 먼저 몸을 던지듯 공간 안으로 들어섰고, 제이가 뒤따라 들어서며 문을 발로 걷어찼다. 낡은 금속 문이 굉음을 내며 닫혔지만, 스캐브가 곧장 문을 향해 달려들며 거대한 망치 의수로 내려찍었다. 콰앙! 육중한 충격음이 귓가를 때렸다. 문이 금방이라도 뜯겨 나갈 것 같았다.
“젠장!”
제이는 욕설을 내뱉으며 주변을 살폈다. 이 통제실은 과거 서버를 관리하던 곳인 듯했다. 부서진 키보드와 낡은 모니터들이 널려 있었고, 한쪽 벽에는 고용량 에너지 셀 보관함이 보였다. 그의 탐색기가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바로 저기였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에너지 셀이.
“형, 어떻게 해요?” 루아의 목소리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네가 저기서 셀을 뽑아. 난 이 문을 막을게.”
제이는 허리춤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섬광탄을 꺼내 들었다. 놈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루아는 망설임 없이 보관함으로 달려갔다. 낡은 패널을 조작하고, 암호를 입력하는 손길이 기계처럼 빨랐다. 그녀는 기술에 능숙했다.
콰앙!
문이 더욱 크게 울렸다.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제이는 섬광탄의 핀을 뽑고 문 뒤에 바싹 몸을 붙였다.
이때였다. 루아의 탄성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형! 찾았어요! 두 개나 있어요!”
제이는 안도하는 한편, 더욱 조급해졌다. 두 개라면 기지는 적어도 한 달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콰앙!
문이 드디어 부서졌다. 낡은 금속 조각들이 튀어 오르는 동시에, 붉은 사이버 옵틱이 번뜩이는 스캐브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포효하며 망치 의수를 휘둘렀다.
“지금이야!”
제이는 섬광탄을 놈의 발치에 던졌다. 섬광탄이 터지는 동시에 강렬한 빛이 통제실 안을 가득 채웠다. 스캐브의 붉은 눈이 잠시 흐려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 제이는 루아의 손을 잡고 통제실 뒤편에 있던 비상 탈출구를 향해 몸을 던졌다. 낡은 철문이 녹슨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곳은 도시의 잿빛 하늘로 바로 연결되는 비상 통로였다.
“서둘러!”
제이는 루아를 밀어 올리며 비상 통로를 기어올랐다. 뒤에서는 여전히 스캐브의 거친 포효가 울리고 있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갔다. 산성비가 다시 그들의 얼굴을 때렸지만, 오히려 차가운 빗물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마침내, 그들은 옥상에 도달했다. 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깜빡이는 도시의 죽어가는 불빛들이 마치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제이는 잠시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빠져나온 건물 아래쪽, 비상 통로 입구에서 붉은 섬광이 다시 번뜩였다. 스캐브가 그들을 쫓아 올라오고 있었다. 놈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이 형, 어떡해요?” 루아가 작은 에너지 셀 주머니를 꼭 쥐며 물었다.
제이의 눈은 멀리 떨어진,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그들의 은신처 방향을 향했다. 갈 길은 아직 멀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끈질긴 그림자가 쫓아오고 있었다.
“뛰어.” 제이는 짧게 말하며 앞장섰다. “멈추지 말고.”
그들의 발소리가 빗물에 젖은 옥상 바닥에 메아리쳤다. 잿빛 도시의 숨결은 여전히 차갑고 잔혹했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 달렸다.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생존 게임 속에서, 그들은 다시 한번 달리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