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내렸다.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세상을 집어삼킬 듯 무겁게 짓눌러왔고, 빗물은 이 대지에 스며들지 못하고 붉게 변색된 흙 위를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오래전부터 이 땅에 드리워진 저주와도 같은 그림자였다. 생명은 시들고, 희망은 조롱당하는 시대. 무림의 고수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을 모색했지만, 결국 모두가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에 갇힌 처지였다.
세상은 ‘강호대전’이라 불리는 거대한 무술 대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열리는 이 대전은 단순한 무림인들의 기량 대결이 아니었다. 혼돈에 빠진 강호를 다스릴 단 한 명의 ‘천위(天位)’를 뽑는 의식이며, 동시에 이 썩어가는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혹은, 그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릴 최후의 칼날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적막한 산길을 걷는 한 사내의 발걸음은 빗소리조차 뚫고 들어올 수 없을 만큼 견고했다. 검은 도포 자락이 빗줄기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지만,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모든 소음을 흡수하는 듯, 기묘한 고요함이 그를 감쌌다. 그의 이름은 흑랑(黑狼). 한때 강호의 밤을 지배했던 암흑의 맹수였다.
“쳇, 이 거지 같은 날씨는 변하는 법이 없군.”
흑랑의 낮은 중얼거림은 빗물에 섞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의 눈빛은 짙은 먹빛이었으나, 그 안에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강렬한 투지가 숨어 있었다. 왼손으로는 허리에 찬 녹슨 검의 손잡이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 이 검은 수많은 적들의 피를 마셨고, 그만큼 주인의 영혼도 깎아내렸다.
산길은 점점 더 가팔라졌다. 길 양옆으로 기괴하게 뒤틀린 고목들이 비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살아있는 망령처럼 손짓하는 듯했다. 이 길의 끝에는 강호대전이 열리는 ‘망각의 전당’이 있었다. 한때는 무림의 성지로 추앙받았으나, 지금은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흑랑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빗줄기가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먹구름 저편, 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지을 그 알 수 없는 힘을 응시하는 듯했다.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는군.”
강호대전. 그 이름만으로도 수많은 무인들이 피를 토하고 목숨을 잃었다. 명예를 위해서? 강호를 위해서? 아니다. 흑랑은 알고 있었다. 이 대전의 진정한 목적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자들의 처절한 발악.
발밑에 무언가가 채였다. 흑랑은 시선을 내렸다. 빗물에 씻겨 반쯤 드러난 것은, 섬뜩하게도 해골의 잔해였다. 낡은 갑옷 조각이 옆에 뒹구는 것으로 보아, 과거 강호대전에 참가했던 무인의 것이리라. 승자의 피는 영광을, 패자의 피는 망각을 새긴다 했지만, 이곳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결국 이 어두운 대지의 일부가 될 뿐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싸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흑랑은 미동도 없이 그 기운을 감지했다. 빠르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위협적인 기세였다.
“이런 길목에서, 쥐새끼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드는군.”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빗물에 젖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거칠게 찢어진 무복을 입고, 얼굴에는 기괴한 문신이 새겨진 사내였다. 그의 손에는 피 묻은 도끼가 들려 있었다.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흑랑… 네놈이 아직 살아있을 줄이야.” 문신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불쾌하게 울렸다. “감히… 망각의 전당에 향하는 길을 밟다니. 강호대전은 네놈 같은 죽은 자가 오를 자리가 아니다!”
흑랑은 문신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기운은 분명 평범치 않았으나, 흑랑에게는 하찮은 벌레에 불과했다.
“죽은 자라… 재미있는 표현이군.” 흑랑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의 발걸음마다 흙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살아있는 네놈보다는, 내가 훨씬 더 생기가 넘칠 텐데.”
문신 사내는 흑랑의 도발에 이성을 잃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건방진 놈! 내 너의 목을 베어, 망각의 전당 문지기에게 바치리라!”
그는 울부짖으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거대한 도끼는 빗물에 젖은 공기를 가르며 흑랑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일격은 바위를 쪼갤 듯한 맹렬한 기세였다. 하지만 흑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도끼가 흑랑의 머리에 닿기 직전, 그의 몸이 마치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문신 사내는 허공을 가른 도끼의 무게에 휘청거렸고, 흑랑은 이미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녹슨 검이 뽑혀 있었다. 빗방울이 검날에 맺혔다가 흐릿하게 흩어졌다.
“이런.” 흑랑의 목소리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만큼 차가웠다. “너무 오래 쉬었나. 손이 좀 굳었군.”
검은 번개처럼 문신 사내의 등과 어깨 사이를 꿰뚫었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검날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문신 사내의 눈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몸부림쳤지만, 흑랑의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 크억!”
흑랑은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검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빗물과 섞여 바닥을 적셨다. 사내는 흑랑의 검을 부여잡으려 했지만, 이미 생명의 힘은 그의 몸을 떠나고 있었다. 그의 몸이 툭, 하고 맥없이 쓰러졌다. 축 늘어진 팔에서 도끼가 굴러떨어져 빗물 웅덩이에 첨벙, 소리를 내며 잠겼다.
흑랑은 쓰러진 사내의 시신을 한 번 흘끗 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검을 거두었다. 검날에 묻은 피는 빗방울에 씻겨 내려갔고, 검은 다시 녹슨 칼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의 그림자는 더욱 깊어진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망각의 전당은 그리 멀지 않았다. 저 멀리, 거대한 암석 봉우리들이 솟아오른 곳에 희미한 불빛이 깜빡였다. 저곳에서, 강호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과연 누가 천위의 자리에 올라 이 썩어가는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더욱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을 것인가.
흑랑은 알고 있었다. 이 대전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단순히 힘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가장 잔혹한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의 심장은 고요한 빗소리 속에서도 맹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오래된 사냥꾼이 먹이를 발견했을 때처럼.
그의 눈빛은 비장함과 함께, 형용할 수 없는 고독함을 담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먹구름은 여전히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빗줄기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흑랑의 검은 도포 자락이 망각의 전당을 향해 묵묵히 나아갔다. 그곳에는 죽음의 축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죽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광은 이미 오래전 사라진 환상에 불과했다.
(1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