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조차 닿지 않는 깊은 숲, 그림자만이 허락된 은밀한 장소였다. 축축한 바위틈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유일한 배경음악인 이곳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심연의 틈새였다. 리아는 젖은 바위에 기대어 숨을 죽였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심장은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벌써 약속 시간을 훌쩍 넘긴 지 오래였다.
“카이…”
나지막이 속삭인 이름은 메아리치지 못하고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었지만,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를 기다리는 초조함과 혹시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이 숲은 인간과 그림자 종족의 경계였다. 언제든 적의 칼날이 번뜩일 수 있는 위험한 땅. 그녀가 감히 넘어선 안 되는 금단의 선이었다.
그때였다. 숲의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조차 만들어낼 수 없는, 미세한 공기의 떨림. 어둠이 짙어진다 생각하는 순간, 그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짙은 머리카락,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밤보다 더 깊은 피부색. 어둠의 후예, 카이였다.
“늦어서 미안해.”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리아는 그 속에 숨겨진 피곤함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가 입고 있는 검은 가죽 옷에서는 흙과 숲의 냄새, 그리고 희미한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와 팔을 더듬었다. 카이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작은 충돌이 있었을 뿐이야. 인간 경비병들이 자꾸 경계를 넘어오고 있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아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인간 경비병. 그녀의 동족. 그녀가 속한 세상의 그림자가 이곳까지 뻗쳐오고 있었다.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어, 카이.”
리아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달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강렬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 강렬함 속에는 그녀만이 읽을 수 있는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알고 있어.”
카이의 대답은 짧았다. 그는 리아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은 항상 차가웠지만, 그 어떤 온기보다도 따뜻하게 리아의 마음을 녹였다.
“더 이상은…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리아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에 카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눈빛에 한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렇게 말하지 마.”
“하지만… 현실은 그렇잖아. 전쟁이 코앞이야. 우리 종족은 서로를 죽여야 해.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대체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는 절망감에 젖어 있었다. 자신들 앞에 놓인 현실은 너무나 잔인했다. 인간과 어둠의 후예. 수백 년간 서로를 증오하고 죽여온 숙적. 그들이 사랑한다는 것은, 두 세상 모두에게 배신이나 다름없었다.
카이는 말이 없었다. 그저 리아를 더욱 세게 품에 안을 뿐이었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귀에 웅웅 울렸다.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는 격렬한 박동이었다.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어.”
그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고통과 번민, 그리고 결연함이 뒤섞인 소리였다.
“나도… 카이.”
리아는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 품 안에서만큼은 모든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품을 벗어나는 순간, 현실의 칼날이 다시 심장을 파고들 터였다.
“어둠의 숲을 지키는 부족장들이… 오늘 밤 회의를 소집했어.”
카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리아는 다시 몸을 움츠렸다. 부족장들의 회의. 그것은 곧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인간 왕국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이미 영주들은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고, 순찰대도 부쩍 늘었어. 우리 마을엔 벌써 징집령이 떨어졌어… 곧 나도 전장에 나가야 할지도 몰라.”
리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서로의 소식은, 서로에게 비수처럼 박혔다. 전쟁은 그들의 사랑을 찢어 발기려 하고 있었다.
“내가 너를… 지킬 거야.”
카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 강렬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어떻게? 네 종족을 배신하고? 아니면 내 종족을 등지고?”
“그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그런 방식이 아니면…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는데? 이 세상에 우리가 함께 설 수 있는 땅이 존재하기는 해?”
리아의 질문은 비수처럼 카이의 가슴을 찔렀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세상은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이 세계에서는 죄악이었다.
갑자기, 숲 저편에서 희미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 경비병들의 경고음이었다. 그 소리는 숲의 정적을 깨고 두 사람의 심장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카이의 몸이 순간 굳었다.
“인간 병사들이야… 꽤 가까이 왔어.”
그의 목소리에는 긴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희미한 그림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숲의 일부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며 접근하고 있었다. 도망칠 시간은 많지 않았다.
“가야 해, 카이.”
그녀는 울먹였다. 지금 그들이 함께 발견된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니, 살아남는다 해도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찢겨나가고 말 것이다.
카이는 리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의 눈빛에는 지독한 고통과 함께, 그녀를 향한 변치 않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다시 만날 거야. 반드시.”
그의 맹세는,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리아를 지탱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어떻게… 언제…?”
리아의 질문에 카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남길 뿐이었다. 차가운 입술,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뜨거운 감정은 그녀의 영혼을 흔들었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카이는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림자가 흐려지고, 그의 형체는 숲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듯 사라져갔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오직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다.
리아는 그가 사라진 어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뿔피리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간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숲을 울렸다.
그녀는 서둘러 몸을 숨겼다. 차가운 바위틈에 웅크린 채, 리아는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두려움 속에서, 그녀는 카이의 마지막 맹세를 되뇌었다.
‘다시 만날 거야. 반드시.’
하지만 이 핏빛으로 물든 세상에서, 그들의 사랑이 과연 어떤 형태로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이 다시 만나는 날은, 서로에게 칼을 겨눈 전장에서일지도 모른다는 잔혹한 예감이 그녀의 영혼을 집어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