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기록 037화: 잿빛 도시의 심장**
회색빛 잔해가 춤추는 도시. 강하준은 낡은 메카, ‘울프팩’의 조종석에 몸을 욱여넣었다. 콕핏 안은 퀴퀴한 땀 냄새와 금속 특유의 비릿한 내음이 뒤섞여 있었지만, 하준에게는 익숙한 고향의 냄새와도 같았다. 닳고 닳은 조종간을 쥔 손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목표, 중앙 데이터 서버실 잔해. 예상되는 위험… 언제나 그랬듯, 전부.” 하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낮은 쇳소리처럼 거칠었다. 생존이 각인된 목소리였다.
울프팩은 육중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무너진 고층 빌딩 사이를 기어가듯 빠져나갔고, 붕괴된 도로 위에 깔린 콘크리트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밟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잿빛 모래가 유리창에 부딪히며 자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계는 최악이었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희망 없는 풍경이었다.
오늘 하준의 임무는 ‘코어’를 찾는 것이었다. 붕괴 전 시대의 중요한 데이터를 저장하던 서버의 중추. 운 좋게 찾을 수 있다면, 며칠치 식량과 교환할 수 있을 터였다. 혹은 울프팩의 낡은 회로를 업그레이드할 귀한 부품이 될 수도 있었다. 생존의 매일은 고단한 도박이었다. 패배는 곧 죽음이었다.
잔해 더미 한가운데서, 희미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었다. 하준의 심장이 조용히 쿵, 하고 울렸다. 찾았다. 그는 울프팩을 멈춰 세우고 주변을 스캔했다.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불길했다. 이 잿빛 도시에 진정한 고요는 죽음과 동의어였다.
울프팩의 거대한 팔이 조심스럽게 잔해를 걷어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그 너머로 녹슨 금속판들이 드러났다. 그 아래, 깨지지 않은 투명한 케이스 안에 푸른빛을 띄는 작은 정육면체 코어가 보였다. 완벽했다. 하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의 신경이 코어에 집중되는 듯했다.
그때였다.
“경고! 미확인 물체 접근! 동쪽 200미터!”
울프팩의 경고음이 찢어지는 듯 울렸다. 하준의 손이 본능적으로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스캔 화면에 붉은 점이 빠르게 깜빡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셋.
“젠장.”
하준이 욕설을 내뱉는 동시에, 동쪽의 무너진 빌딩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삐걱거리는 고철들이 덕지덕지 붙은 끔찍한 형상. 흡사 거대한 거미를 연상시키는 여섯 개의 다리와 톱니바퀴가 달린 턱이 섬뜩했다. ‘고철 괴물’이었다. 붕괴 이후,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
“하필 지금이냐!”
하준은 울프팩을 급회전시켰다. 코어를 버릴 수는 없었다. 이 순간을 위해 며칠을 굶었다. 울프팩의 오른쪽 어깨에 장착된 대구경 라이플이 불을 뿜었다. ‘콰앙!’ 작렬하는 포탄이 고철 괴물의 다리에 명중했다. 금속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괴물은 비틀거릴 뿐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경고! 추가 개체 접근! 북서쪽 150미터!”
두 번째 고철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좀 더 육중한, 거대한 망치를 든 듯한 형상이었다.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특히 이 낡아빠진 울프팩으로는.
“후퇴는 없다.” 하준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코어가 있는 잔해 더미를 등지고 섰다. 마치 새끼를 지키는 어미 늑대처럼, 거대한 메카는 작은 코어를 위해 기꺼이 방패가 되었다.
첫 번째 거미형 괴물이 날카로운 다리를 휘둘러왔다. 울프팩은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피했다. 거대한 다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찍어 누르며 폭발음 같은 충격을 만들어냈다. 하준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울프팩의 왼팔에 숨겨진 진동 블레이드를 꺼내 들었다. 푸른빛 섬광이 번쩍였다.
“받아라, 고철 덩어리!”
블레이드가 거미형 괴물의 옆구리를 깊숙이 갈랐다. ‘끼이이이익!’ 날카로운 쇠 긁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스파크가 튀고, 검은 기름 같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괴물은 고통스러운 기계음을 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을 노려 두 번째 망치형 괴물이 거대한 팔을 휘둘러왔다.
‘콰아앙!’
울프팩의 왼쪽 어깨에 직격했다. 충격이 조종석을 강타했다. 하준은 안전벨트에 몸이 조여드는 고통을 느끼며 신음했다. 경고등이 붉게 물들었다. “좌측 팔 관절 손상! 방어막 30%!”
“이런… 젠장할!” 하준은 망가진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미미한 반응만 있을 뿐이었다. 기체 전체에 비명이 울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거미형 괴물이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망치형 괴물이 길을 막는 사이, 하준은 순식간에 판단했다. 회피는 불가능하다.
“막아라!”
울프팩은 남은 오른팔을 들어올려 거미형 괴물의 다리를 막아냈다. ‘쨍그랑!’ 쇠와 쇠가 부딪히는 굉음과 함께 울프팩의 팔이 더욱 뒤로 밀려났다. 이대로는 양쪽에서 협공당해 산산조각 날 터였다. 그가 죽는 건 둘째치고, 코어를 잃을 수도 있었다.
하준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그는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을 명령했다. 울프팩의 코어 에너지를 끌어올렸다. 과부하 경고음이 울렸지만 하준은 무시했다.
“돌격!”
울프팩은 마치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맹수처럼, 망치형 괴물에게 맹렬하게 돌진했다. 망가진 왼팔로 괴물의 몸통을 들이받고, 동시에 오른팔의 라이플을 괴물의 머리에 밀착시킨 채 발사했다.
‘쿠구구궁!’
거대한 폭음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망치형 괴물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수많은 고철 파편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울프팩도 그 충격에 휘청이며 주저앉을 뻔했지만, 하준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나를 처리했다. 하지만 울프팩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오른팔 라이플은 과열되어 먹통이 되었고, 왼쪽 팔은 거의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방어막은 바닥을 드러냈다.
거미형 괴물은 잠시 움찔하더니, 분노에 찬 기계음을 내며 다시 달려들었다.
“이젠… 내가 할 차례다.”
하준은 조종간을 뽑아내고, 비상 메뉴얼 레버를 힘껏 당겼다. 콕핏이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고장 난 왼팔에서 진동 블레이드를 간신히 빼냈다. 울프팩의 몸체는 방패처럼 사용하고, 자신은 직접 뛰어들었다. 조종사의 갑옷 역시 낡았지만, 마지막 발악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미쳤군.” 하준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다.
울프팩의 잔해 뒤에 몸을 숨긴 채, 거미형 괴물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괴물이 울프팩의 잔해를 부수고 지나가려는 찰나, 하준은 몸을 날렸다. 잿빛 대기 속을 가르는 한 줄기 그림자였다.
진동 블레이드의 푸른 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거미형 괴물의 약점, 즉 관절 연결부를 노렸다. 날카로운 블레이드가 경화된 강철을 찢고 들어갔다. ‘쉬이이익!’ 괴물의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괴물은 비틀거렸다. 하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뛰어들어 다른 다리를 노렸다. 이어진 맹공에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고철 더미 속에서 미미한 스파크만 튀길 뿐이었다.
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블레이드를 움켜쥐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그의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그는 살아남았다. 또다시.
그는 간신히 코어를 회수했다. 푸른빛 코어가 손안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생존의 증거이자 내일의 희망이었다.
고장 난 울프팩의 콕핏에 다시 몸을 욱여넣었다. 통신 채널을 연결했다. 노이즈 가득한 정적만이 흘렀다. 잠시 후, 멀리 떨어진 본부에서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부, 여기 하준. 임무 완료. 코어 확보. 울프팩은… 만신창이. 수리 필요.”
오랜 기다림 끝에, 미약한 통신음이 들려왔다.
“하준… 들린다. 위험하다, 돌아와라. 북쪽 폐기물 구역에서 미확인 신호 감지. 너무… 강해.”
하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확인 신호? 이 잿빛 도시에서, 아직도 감지될 만큼 강력한 신호라니. 그것도 폐기물 구역에서. 붕괴 이후, 그곳은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 죽음의 땅이었다.
“신호? 어떤… 신호입니까?” 하준은 불길한 예감에 숨을 들이켰다. 목소리에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붕괴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너무나… 완벽한. 마치 잠들어있던 거인이 깨어나는 듯한.”
하준의 등골에 한기가 스쳤다. 붕괴 이전의 것. 잠들어있던 거인. 그것은 생존의 희망이 될 수도, 아니면 모든 것을 집어삼킬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부서진 울프팩의 스캐너를 다시 한번 가동시켰다. 북쪽, 폐기물 구역. 희미하지만 확실한 에너지 파동이 느껴졌다. 거대하고, 고요하며, 그리고… 깨어나고 있었다.
하준은 코어를 꽉 움켜쥐었다. 내일은 또 어떤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 ‘거인’은 과연 무엇일까. 잿빛 도시의 심장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