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에서 끈질긴 비가 쏟아져 내렸다. 마법 학교의 낡은 석탑들은 거대한 비석처럼 침묵 속에 서 있었고, 한때는 희망과 지식의 등대였던 그곳은 이제 절망과 망각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빗물은 교정의 핏자국들을 씻어내리는 듯했지만, 붉은 얼룩은 마치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축축한 바닥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이진우는 망가진 창문 너머로 빗줄기를 응시했다. 차가운 바람이 깨진 유리창 틈새로 불어와 그의 뺨을 스쳤다. 피부에 닿는 한기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아래층에서는 기괴한 으르렁거림과 긁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감염된 자들이었다. 한때는 스승이었고, 친구였으며, 연인이었을 존재들. 이제는 오직 허기와 광기만이 남은 시체 덩어리들.
“이대로 가다간, 일주일도 못 버틸 거야.”
옆에 선 서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절망감이 배어 있었지만, 두 눈에는 여전히 날카로운 불꽃이 살아 있었다. 서연은 마법 명문가의 딸로, 이 학원의 수석 졸업생다운 실력과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무의의 지물이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알아.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우리를 불렀겠지.” 이진우는 허리춤의 단검을 꽉 쥐었다. 그는 마법적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해 흔히 ‘낙제생’이라 불렸지만, 현실적인 판단력과 생존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정확히 뭘 찾아오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엘드린 교장의 지시는 모호했다. ‘학원 지하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이 모든 것을 끝낼 유일한 희망’이라는 말뿐이었다. 그 ‘희망’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학원의 지하에는 절대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오래된 금기가 전해져 내려왔을 뿐. 지금은 그 금기를 깰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가자.” 서연이 먼저 발걸음을 뗐다.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하로 향하는 입구는 도서관 가장 안쪽에 숨겨져 있었다. 낡은 고문서들로 가득 찬 서가 중 하나를 밀어내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는 음산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들을 유혹했다. 마법진이 새겨진 거대한 강철 문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이게 그 문인가.” 이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전설로만 듣던, ‘어둠의 심장’으로 향하는 입구.”
“그래. 이 문이 열리는 건 오직 학원이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뿐이라고 했어.” 서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복잡한 문양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대의 언어로 된 주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강철 문에 새겨진 문양들이 푸른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묵직한 마력이 주위를 휘감았다.
키잉-! 굉음과 함께 강철 문이 천천히, 그리고 웅장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시큼하면서도 퀴퀴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지하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생명력이 없는 차가운 바람.
“조심해.” 이진우가 앞장섰다. 그의 단검 끝에서도 옅은 마나의 빛이 어른거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이곳은 단순한 창고나 비밀 연구실이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하고 끔찍한 것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눅눅한 습기와 함께 곰팡이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풍기는 피비린내가 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첫 번째 지하층은 오래된 실험실처럼 보였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테이블 위에는 알 수 없는 시약 병들과 낡은 연구 일지들이 널려 있었다.
이진우는 낡은 일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고대의 마법 문자가 적혀 있었다. “해독할 수 있겠어?”
서연이 눈을 찌푸리며 읽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오르쿠스’, ‘생명의 연금술’, ‘죽음을 넘어선 존재’… 이건 학원에서는 금지된 연구들이야. 시체 강령술과 생체 마법의 결합. 죽은 자를 되살리고, 더 나아가 변형시키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제정신이 아니잖아.”
그때였다. 으르렁-!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피부는 썩어 문드러졌고, 뼈가 드러난 손톱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일반적인 감염자들과는 달랐다. 눈은 이글거리는 녹색 빛을 띠었고, 몸에서는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졌다.
“강화된 감염자…! 조심해!” 이진우가 단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괴물의 팔을 스쳤지만, 괴물은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듯 더욱 빠르게 달려들었다.
서연의 지팡이 끝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파이어볼트!” 붉은 화염 덩어리가 괴물에게 명중했지만, 괴물은 잠시 휘청거릴 뿐, 곧바로 회복하여 달려들었다.
“젠장, 마법 저항력까지 있어!” 이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괴물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옆에 놓인 무거운 철제 의자를 발로 걷어차 괴물에게 던졌다. 괴물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이진우는 단검을 힘껏 휘둘러 괴물의 목을 찔렀다. 썩은 살점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괴물은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녹색 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이런 녀석들이 더 있다는 거야?” 서연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아마도.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겠지.” 이진우는 괴물의 시체를 훑어보았다. “이들의 마법 저항력은… 외부에서 온 감염자들과는 달라. 마치 이 지하에서 길러진 존재들 같아.”
두 번째 지하층은 더욱 넓고 복잡했다. 수많은 격리실들이 늘어서 있었고, 철문마다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대부분의 문은 열려 있었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봉인되어 있던 무언가가 탈출한 것처럼.
이진우는 한 격리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낡은 구속구와 마법적 봉인을 위한 장치들이 보였다. 벽에는 누군가가 손톱으로 긁어낸 듯한 끔찍한 자국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은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여기는… 실험 대상들을 가두던 곳 같아.” 서연이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뭘 연구했던 거지?”
“아마 우리가 찾는 ‘희망’과 연관되어 있겠지.” 이진우는 한숨을 쉬었다. 이 학원이 저지른 짓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끔찍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세 번째 지하층으로 통하는 거대한 통로에 도착했다. 통로 끝에는 거대한 원형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균열이 존재했다. 균열에서는 섬뜩한 녹색 빛이 주기적으로 섬광처럼 뿜어져 나왔고,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기도 하고, 고통받는 영혼의 비명 같기도 한 불길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이게….” 서연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심장이었다. 아니, 심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검붉은 육체 덩어리. 촉수 같은 혈관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와 주변의 거대한 마법 구조물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육체 덩어리 곳곳에서는 기괴한 얼굴들이 일그러진 채 돋아나 있었고, 핏줄처럼 번지는 녹색 빛이 끔찍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게… ‘희망’이라고?” 이진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순수한 절망, 그 자체였다.
서연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건… ‘고대 금지 마법’의 기록에 나오는… ‘뒤틀린 생명체’, 모든 생명을 오염시키는… ‘원형’.”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육체 덩어리에서 녹색 빛이 강렬하게 터져 나왔다. 동시에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끔찍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변의 거대한 마법 구조물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젠장, 도망쳐! 이게 그 금기야! 이 학원이 만든… 재앙의 근원이라고!” 이진우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절망이 아닌, 순수한 공포가 실려 있었다. 그들은 ‘희망’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파멸의 씨앗, 이 모든 종말의 시작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순간, 녹색 빛을 내뿜는 육체 덩어리에서 수백 개의 촉수가 튀어나왔다. 끔찍한 속도로 뻗어 나오는 촉수들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안 돼…!” 서연이 지팡이를 들어 방어 마법진을 펼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학원의 가장 깊은 곳, 가장 끔찍한 금기가 마침내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이 모든 종말의 진실이 거대한 그림자로 드리워졌다. 그들은 이제 선택해야만 했다. 이 괴물을 파괴할 것인가, 아니면 이 괴물에게 모든 것을 내줄 것인가.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