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은하수호는 심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 인류가 이제 막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미지의 영역. 이곳의 모든 것은 경이로움과 위험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물론, 은하수호의 승무원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지루함’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말이다.

“선우 박사님, 저쪽 은하군 너머에서 이상 신호가 잡힙니다. 패턴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조타석에 앉아 있던 지훈이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의 시선은 메인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흥미가 섞여 있었다.

선우는 데이터 패드를 들여다보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은하수호의 수석 외계생물학자였다. 헝클어진 단발머리, 돋보기 안경 너머로 빛나는 총명한 눈빛은 그녀가 얼마나 이 탐사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독특하다고요? 어떤 면에서요?” 선우의 목소리에는 단조로움 속에서 새로운 변수를 발견했을 때의 미묘한 설렘이 깃들어 있었다.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마치 심장이 뛰는 소리 같달까요? 불규칙한데, 또 일정한 리듬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인공적인 신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훈은 헤드셋을 벗어 던지며 등받이에 기댔다. “그리고… 에너지 파장이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형태입니다. 분석 결과, 기존 문명권의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 전혀 없어요.”

선우의 눈빛이 더욱 반짝였다. “말도 안 돼. 그럼 미지의 유기체 신호일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요?”
“글쎄요. 유기체라고 하기엔 너무… 정교합니다. 하지만 인공물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자연스러워요.” 지훈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선우 박사님이라면 분명 좋아할 만한 미스터리일 겁니다.”

그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선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흥미로운 표정으로 메인 스크린을 노려봤다.
“경로 변경하세요. 이현 선장님께 보고하고, 해당 신호의 근원지로 이동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사님 명령대로.” 지훈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조작하며 은하수호의 경로를 수정했다. 그의 옆모습은 제법 진지했지만, 선우는 문득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녀석, 이런 미스터리를 꽤 즐기는 타입이지. 하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며칠 후, 은하수호는 신호의 근원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짙은 성운과 암흑 물질이 뒤섞인, 마치 우주의 자궁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믿을 수 없는 것이 떠 있었다.

“세상에… 저게 대체…” 선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메인 스크린에 잡힌 그것은 거대한 수정과 같았다. 육각형의 기하학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표면에는 부드러운 유기체처럼 맥박이 뛰는 듯한 미세한 광선들이 흐르고 있었다. 색깔은 예측 불가능하게 변했다. 때로는 심해처럼 깊은 푸른색이었다가, 때로는 불타는 노을처럼 붉은색으로, 때로는 밤하늘의 은하처럼 수억 개의 별을 품은 듯 반짝였다.

“감지 장치로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습니다, 선장님.” 관제석에 앉아 있던 통신병 나리의 목소리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에너지 반응도 없고, 물질 구성도 불분명합니다.”

이현 선장은 굳게 다문 입술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선우 박사, 지훈 대원. 조사팀 꾸려 저것을 은하수호로 회수합니다. 최우선적으로 안전 수칙을 준수하고,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선장님.” 선우는 흥분으로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훈은 선우의 옆에 서서 피식 웃었다. “선우 박사님, 완전 신났네요. 제가 보기엔 위험해 보이는데요?”
“이런 미지의 존재 앞에서 흥분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요? 지훈 대원도 속으로는 저보다 더 신나 있을걸요.” 선우가 지훈을 흘긋 보며 말했다.
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도 호기심과 모험심이 역력했다.

***

유물은 거대한 격리실로 옮겨졌다. 유물을 회수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순조로웠지만, 은하수호의 과학자들은 그 어떤 분석도 성공하지 못했다. 유물은 여전히 침묵했고, 빛깔만 오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미치겠네. 아무것도 안 나와. 진짜 아무것도!”
선우는 격리실 관제실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일주일째였다. 온갖 스캐너와 분석 장비를 동원했지만, 유물은 묵묵부답이었다.

“선우 박사님, 좀 쉬세요. 거의 사흘 밤낮을 여기서 보내셨잖아요.”
지훈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피곤한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 같은 여유가 묻어 있었다.

“쉬긴 뭘 쉬어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발견인데, 이걸 그냥 내버려 두라고요?” 선우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차는 감사히 받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에 전해졌다.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됐죠. 어차피 선장님은 안전 문제 때문에 더 이상의 직접적인 접촉은 금지시켰고요.” 지훈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게 혹시… 그냥 예쁜 돌멩이 아닐까요? 우주 어딘가에 있는 돌멩이 말이죠.”

“지훈 대원!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이건 분명… 뭔가 특별한 거예요. 제가 느껴요.”
선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유물을 응시했다. 유물은 평소보다 더욱 강렬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바로 그때, 관제실 문이 벌컥 열리며 통신병 나리가 뛰어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선우 박사님! 지훈 대원님! 큰일 났어요! 맙소사, 제가 뭘 본 건지 아세요?”
나리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진정해요, 나리 대원. 무슨 일인데 그래요?” 지훈이 나리에게 물었다.
“기관실에요! 김 대원이… 김 대원이요!” 나리는 말을 더듬었다.
“김 대원이 뭐요?” 선우가 초조하게 물었다.

“김 대원이… 글쎄, 갑자기 기관실 한복판에서… ‘사랑해, 은하수호!’ 라고 외치면서 춤을 춰요! 맙소사, 진짜 미쳤나 봐요! 평소에 그런 사람 절대 아닌데!”
나리의 말을 듣고 선우와 지훈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해, 은하수호라니? 푸하하하! 김 대원 로봇이랑 사랑에 빠졌나 보네.” 지훈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선우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김 대원만 그런가요? 다른 승무원들은요?”
“아니요! 지금 복도에서 정비팀 이 대원님이 통신팀 박 대원님한테 난데없이 꽃을 주면서 고백했어요! 꽃도 없는데 그냥 맨손으로 꽃다발 흉내를 내면서요! 그리고… 그리고…!” 나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뭐요?” 선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제가 아까 지훈 대원님한테… ‘지훈 대원님, 사실 저 대원님 좋아해요!’ 라고 말할 뻔했어요!”
나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정적이 흘렀다. 선우와 지훈은 동시에 나리를 바라봤고, 나리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나리 대원, 그게 무슨…” 지훈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선우가 그의 말을 끊었다. “나리 대원, 언제부터 그런 말을 하고 싶어졌죠?”
“글쎄요… 격리실 앞을 지나면서부터 갑자기 심장이 막 뛰고, 말하고 싶고… 아, 정말 창피해요!”

선우는 격리실 안에 있는 유물을 바라봤다. 여전히 분홍빛으로 반짝이는 그것.
“지훈 대원, 나리 대원. 격리실 주변에 있는 모든 승무원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이상 행동이 나타난 시점을 분석하세요.” 선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진지했다.
“설마… 이 유물 때문이라는 거예요?” 지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확인해 봐야죠.”

***

선우의 지시는 정확했다.
유물에 가까이 다가갔던 승무원들일수록 이상 행동이 더 심하게 나타났다. 특히 감정 표현이 억제되었던 이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던 이들일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김 대원은 은하수호에게 고백했고, 이 대원은 박 대원에게 허공에 꽃을 건네며 구애했다. 심지어 늘 무뚝뚝하던 보안팀장까지 점심시간에 갑자기 자신의 우주모험담을 시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정말… 말도 안 돼.”
선우는 상황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유물은 이제 은은한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감정을, 특히 억압된 감정을 증폭시키는 파장을 내보내고 있어요. 그것도… 연애 감정 위주로.”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저도 조심해야겠네요. 저도 꽤 많은 감정을 억누르고 있으니까.” 그의 말에 선우는 왠지 모르게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훈의 말에 담긴 미묘한 의미를 그녀는 알아차린 것 같았다.

“당연히 조심해야죠! 특히 지훈 대원 같은… 으흠, 그런 타입은 더욱요.” 선우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잠시 지훈에게 머물렀다.
“제가 어떤 타입인데요?” 지훈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능글맞고… 능글맞고… 또 능글맞은 타입이요!” 선우는 빽 소리치듯 말했다.

바로 그 순간, 유물의 색깔이 더욱 강렬한 붉은색으로 변하며 섬광처럼 빛났다.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가렸다. 그리고 섬광이 잦아들자, 격리실 안의 유물은 엄청난 속도로 맥박이 뛰는 것처럼 빛났다.

“맙소사, 이건 또 뭐야!” 지훈이 경악했다.
“유물 에너지가 갑자기 최고조로 치솟았어요! 비상! 비상!” 선우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선우 박사님!”
지훈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굳어 있었고, 눈빛은 진지했다.
“사실 제가 선우 박사님을…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관제실 안은 유물의 격렬한 빛과 지훈의 폭탄선언으로 가득 찼다.
선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녀는 멍하니 지훈을 바라봤다.
“지… 지훈 대원? 갑자기 무슨… 농담 그만해요!”

“농담 아니에요! 박사님이 데이터를 분석할 때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 초롱초롱한 눈빛이 너무 좋았고, 제가 장난치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결국은 다 받아주는 그 모습도 좋았고, 가끔 저한테 툭툭 던지는 말 속에서도 절 챙겨주는 그 마음이…!”
지훈은 거의 랩을 하듯이 말을 쏟아냈다. 평소의 능글맞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그의 얼굴은 진지함과 당혹감,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고백의 열기로 가득했다.

선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유물의 영향일까? 아니면…
“지… 지훈 대원… 당신 미쳤어요?” 선우는 겨우 입을 떼었지만,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미친 것 같아요! 이 유물 때문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지금 당장 박사님한테 제 마음을 다 말하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아요!”
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우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선우는 뒷걸음질 쳤다. 얼굴은 여전히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이… 이봐요! 지금은 비상 상황이라고요! 유물 에너지를 어떻게든 진정시켜야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진정시킬 수 없어요! 제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니까요!” 지훈은 거의 절규하듯이 말했다. “박사님, 저랑 사귀어 주세요! 지구로 돌아가면 제가 박사님 좋아하는 모든 행성을 같이 가줄게요! 박사님이 발견하고 싶은 모든 외계 생물을 같이 찾아줄게요!”

“오, 세상에!” 선우는 머리를 감쌌다. 그녀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유물의 영향이라는 건 알지만, 지훈의 눈빛은 너무나 진심이었다. 그의 고백은 너무나 솔직했고,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흔들었다.
“지훈 대원! 제발… 제발 좀 진정해요!”

바로 그때, 이현 선장의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울려 퍼졌다.
“선우 박사! 지훈 대원! 대체 거기서 뭘 하는 건가! 지금 은하수호 전체 승무원들이 단체로 이상 행동을 보이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다! 빨리 유물을 진정시켜라!”
선장의 목소리에서도 평소에 들을 수 없었던 격앙된 감정이 엿보였다. 아마 선장도 영향을 받고 있는 듯했다.

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선장님도… 어쨌든! 유물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한 것 같아요.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요!”
“방법이요? 박사님의 마음을 받아주는 거요?” 지훈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선우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논리적으로 생각해요, 지훈 대원!”

“사랑은 논리가 아니에요, 박사님!” 지훈이 한 발 더 다가왔다.
선우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녀의 등은 차가운 금속 벽에 닿았다.
“지훈 대원… 지금 이성적이지 못하잖아요! 이 유물이 우릴 조종하는 거라고요!”

“조종당하는 게 이렇게 행복하다면, 전 평생 조종당하고 싶습니다!”
지훈은 선우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뜨거웠다.
유물은 여전히 강렬하게 붉은빛을 내뿜으며 격렬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선우는 지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유물의 영향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간절한 진심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가슴은 이상하게도 두근거렸다.
“지훈 대원… 당신 바보예요?”
선우의 말에 지훈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유물의 붉은빛이 갑자기 부드러운 분홍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것처럼.
유물이 잠잠해지자, 지훈의 얼굴에서 아까의 걷잡을 수 없는 열기는 사라지고, 대신 엄청난 민망함이 밀려왔다.
“어… 어라? 유물이 왜…” 지훈은 선우의 손을 놓으며 어색하게 뒤로 물러섰다. “선우 박사님, 제가… 제가 방금 뭐라고 했죠…?”

선우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글쎄요? 저는 들은 게 없는데요?” 선우는 애써 딴청을 피웠지만, 귀 끝까지 빨개져 있었다.
지훈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었다. “오, 세상에… 제가 또 사고를 쳤군요. 박사님, 제발… 방금 그건 잊어주세요. 유물 때문에 제가…”

“유물 때문에? 유물 때문에 제가 당신의 그 헛소리를 다 들었다고요!” 선우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화가 아닌, 묘한 설렘과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유물은 이제 거의 빛을 내지 않고, 처음 발견되었을 때처럼 오묘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격리실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

은하수호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울고불고 난리 피웠던 승무원들은 유물이 잠잠해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돌아왔다. 다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미묘한 어색함과 함께 뭔가 새로운 감정들이 싹트기 시작한 듯했다. 기관실의 김 대원은 여전히 로봇과 대화했지만, 이젠 ‘사랑해’ 대신 ‘안녕, 파트너’라고 말했다. 이 대원과 박 대원은 어색하게 서로에게 웃어 보였다.

이현 선장은 격리실 관제실로 들어와 유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유물이었군.” 선장의 목소리에는 묘한 감회가 섞여 있었다. 그는 선우와 지훈을 번갈아 쳐다봤다. “너희들은… 괜찮나?”

선우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장님. 유물은 이제 활동을 멈춘 것 같습니다. 다만, 그 기능에 대한 더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훈은 선우 옆에서 뻣뻣하게 서 있었다. 얼굴은 아직도 미묘하게 붉은 기가 가시지 않았다.
“저… 저도 괜찮습니다, 선장님.”

“흐음.” 이현 선장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나저나, 김 대원이 자네에게 한 고백은… 진심이었나?”
선장은 지훈이 아닌 선우를 보며 물었다.

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훈의 얼굴은 이제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선장님! 그… 그건 유물의 영향이었지 않습니까! 절대, 절대 아닙니다!” 지훈이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이현 선장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가. 내 눈에는 왜 진심으로 보이던지.” 그는 빙글 돌아서며 나갔다. “어쨌든, 수고했다. 보고서는 정확하게 제출하도록.”

선장이 나가자마자 지훈은 선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박사님! 제발 선장님께… 오해라고 말씀해주세요! 저는 절대 그런 마음이…”
선우는 팔짱을 끼며 지훈을 노려봤다.
“마음이 없다고요? 방금 전까지 저랑 지구로 돌아가면 행성이랑 외계 생물 같이 찾아주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누군데?”
“그… 그건 유물 때문이었다니까요!”
“어디, 유물이 없어지니 진심도 없어졌나 보네.” 선우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훈은 당황했다. 선우의 표정은 분명 화를 내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실망한 듯한 기색도 엿보였다.
“아니, 그게 아니고… 물론 제가 박사님께 호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너무 갑자기…”
지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더듬었다. 유물이 사라지자 그의 마음속에 있던 복잡한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엉켜버렸다.

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됐어요. 어차피 유물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잊어요, 우리.”
선우는 뒤돌아서서 격리실의 유물을 다시 응시했다. 유물은 이제 완벽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듯이.

지훈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선우의 뒤로 다가섰다.
“박사님… 제가 헛소리를 많이 했지만… 한 가지는 진심이었어요.”
선우는 아무 말 없이 유물을 바라봤다.
“박사님이 안경 너머로 데이터 분석할 때 초롱초롱한 눈빛… 그거 진짜 예뻐요. 그리고… 제가 장난치면 결국 다 받아주는 것도요.”
지훈의 목소리는 아까처럼 격렬하지 않았지만, 훨씬 더 솔직하고 따뜻했다.

선우는 미세하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뒤돌아 서 있었다.
“나 참. 유물 덕분에 평소에 못 할 말 다 하고 좋겠네요.”
“아니요! 유물 덕분에 용기를 냈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젠 유물이 없어도 말할 수 있어요.”
지훈은 살짝 몸을 숙여 선우의 얼굴을 마주 보려 했다.

선우는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발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요?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요?”
지훈은 선우의 미소를 보자 용기가 샘솟는 것을 느꼈다. 유물이 없어도.
“이제부터… 박사님께 정식으로 고백하려고요. 매일매일, 유물 없이도요.”
그는 어색하지만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선우는 피식 웃었다. “매일매일이라니. 지훈 대원, 우주선에서 할 일도 없나 봐요?”
“천만에요!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박사님 마음 얻는 일, 그리고… 저 유물을 연구하는 일!” 지훈은 유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용기 하나는 제대로 얻었으니까요. 어쩌면 이건… 우주 최고의 연애 코치였을지도요?”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유물을 향하지 않고 지훈을 향하고 있었다.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네요.”
“사랑스러운 사람이죠.” 지훈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선우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한숨은 더 이상 짜증이 아니었다.
“지훈 대원.”
“네, 박사님.”
“내일 저녁, 같이 저녁 먹을래요?”
지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영광입니다, 박사님! 제가 직접 요리해 드릴게요. 우주선에서 나는 최고의 요리사라고요!”

선우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에 비친 유물은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제 그녀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 미지의 존재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유물은 우주의 작은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 은하수호 전체를 사랑에 빠뜨리려 했던 고대의 연애 코치였을지도.
은하수호는 다시 심우주를 유영했다. 이제 두근거리는 것은 유물이 아닌, 선우와 지훈의 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