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0화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하윤은 어둠이 내려앉은 방안, 흐릿한 조명 아래서 낡은 서류철을 붙들고 있었다. 손끝에서 종이의 마른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수십 년의 시간을 품은 그 서류들은 마치 숨 쉬는 유령처럼, 과거의 비극을 현재로 소환하는 듯했다. 그 속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한때 몸담았던 회사의 이름과, 그 회사의 부도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명단, 그리고 그 중심에 희미하게 박혀있는 ‘지훈’의 가문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분명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가장 따뜻하고 존경스러운 존재였다. 강직하고, 올바른 길만 걸어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 그런데 이 서류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연루되었던, 한때 도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 비리 사건의 그림자가 지훈의 집안에까지 닿아있었다니. 지훈의 할아버지가 모든 것을 잃고 와병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저 안타까워만 했을 뿐, 그 비극의 한 조각이 자신의 아버지와 엮여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손이 떨렸다. 서류가 바닥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하윤은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날,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한 약속을 했다. 하얗게 부서지는 눈송이처럼 순수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그 약속은 언제나 그녀의 마음속 가장 따뜻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약속은 차가운 얼음처럼 산산조각 날 위기에 처했다. 이 진실을 지훈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조차, 죄책감으로 얼룩질 터였다.

그날 밤, 하윤은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 준비를 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낯설었다. 희망을 잃은 눈빛, 창백한 피부. 이런 모습을 지훈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아니, 이런 자신을 지훈의 곁에 둘 수는 없었다.

정오 즈음, 지훈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저녁에 만날 수 있을까? 네 얼굴이 보고 싶어.]

하윤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잠시 망설이다 겨우 답장을 보냈다. [응, 그래.]

퇴근 후, 두 사람은 예전에 자주 가던 강가의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창밖으로는 겨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마지막 햇살이 강물 위에서 반짝이며 부서지는 풍경은 평소라면 하윤의 마음에 따뜻한 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희미하고 멀게 느껴졌다.

“무슨 일 있어? 어제부터 연락도 잘 안 되고, 얼굴도 많이 지쳐 보여.”

지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윤의 손을 잡았다. 그의 온기가 하윤의 차가운 손에 전해지자, 그녀는 그 온기마저 거부하고 싶어졌다. 이 따뜻함은 곧 사라질 것이고, 그에게 상처만 줄 것이라는 잔인한 확신 때문이었다.

하윤은 잡힌 손을 스르륵 빼내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야, 그냥 요즘 일이 좀 많아서.”

“정말? 네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데.” 지훈의 목소리에 걱정과 함께 미약한 서운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하윤의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윤은 목이 메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진실은 그를 파괴할 수도 있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그녀는 그 칼날을 그에게 들이댈 용기가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베이는 편이 나았다.

“지훈아… 우리,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치 얼음 조각 같았다. 차갑고 날카로워서, 자신의 혀끝마저 얼리는 듯했다.

지훈의 눈이 흔들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윤아. 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아니, 문제라기보다… 내가 좀 힘들어서.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어울리지 않는다니. 그동안 수많은 시간을 함께 웃고 울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던 두 사람이었다.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영원을 맹세했던 두 사람이었다. 이별을 고하는 이유치고는 너무나도 허술하고, 너무나도 잔인한 말이었다.

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윤을 응시했다. “하윤아, 제발. 솔직하게 말해줘.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 우리의 약속들, 전부 다 거짓이었다는 거야? 네가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기대라고 했잖아.”

그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그의 눈빛은 간절함으로 가득했다. 그 눈빛에 하윤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의 간절함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찢어놓았다. 그를 향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에게 고통을 줄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애써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그 약속… 이제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카페 문이 열리고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지훈 씨, 하윤 씨! 여기서 데이트하고 있었네요?”

미정이었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다가와 두 사람 사이에 서슴없이 끼어들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 하윤의 불안한 시선을 비웃는 듯한 미소였다.

하윤의 심장이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미정은 언제나 지훈을 맴돌며 그에게 관심을 표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미정의 아버지가 지훈의 아버지와 오랜 사업 파트너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시 미정이… 이미 알고 있는 걸까? 그 모든 진실을?

지훈은 미정의 등장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정 씨, 잠시 얘기 중이었으니, 나중에 다시 연락하죠.”

“어머, 방해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지훈 씨,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지훈 씨 회사에서 추진 중인 신규 사업 건 말이에요. 지훈 씨의 아버님과 저희 아버님이 옛날에 큰 피해를 봤던 그 사건… 그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제가 우연히 발견해서요. 지훈 씨가 아시면 많이 놀라실 것 같아서요.”

미정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러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하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윤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미정이 던진 말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심장을 관통했다. 결국, 이렇게 터져버리는구나.

지훈은 미정의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예요? 어떤 자료요?”

“글쎄요, 지훈 씨가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중요한 자료인 만큼, 직접 전달해 드려야겠죠? 하윤 씨도 함께 들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죠, 하윤 씨?”

미정의 눈은 하윤을 향해 비웃는 듯한 승리감에 차 있었다. 하윤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진실이 지훈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파멸로 이끌 수는 없었다.

하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안해, 지훈아. 난 더 이상 너와 함께할 수 없어.”

그녀는 다시 한번 얼어붙은 말을 내뱉고는, 지훈의 굳어진 얼굴과 미정의 야릇한 미소를 뒤로한 채 카페를 뛰쳐나갔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그녀의 폐부를 찔렀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훈의 곁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이 지독한 진실의 그림자에서 그를 보호하고 싶었다.

강가에 섰다. 강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눈을 감자,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 지훈과 함께 손을 잡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의 약속은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 약속은, 겨울 강물처럼 차갑고 깊은 상처만을 남긴 채, 과거 속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녀의 결심은 굳었다. 이 모든 짐은, 자신이 짊어져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