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고요한 침묵 속의 아우성
푹신한 인조 잔디 위로 발자국을 내딛자, 웅장한 아틀라스 신전의 돌기둥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기원 불명의 덩굴들이 기둥을 휘감고, 그 틈새로 고대 문명이 남긴 상형문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진우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듯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실제 몸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좁은 원룸 침대에 누워있지만, 그의 정신은 완벽히 게임 속 세계, 『아틀라스의 유산』에 동화되어 있었다.
“젠장, 또 함정이잖아!”
진우의 분노 섞인 외침과 함께 허공에서 푸른색 시스템 메시지가 번개처럼 솟아올랐다.
[함정 발동! 날아오는 화살촉을 회피하십시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쉭, 쉭!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세 개의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는 그의 왼쪽 어깨를 스치며 미약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착용하고 있던 가죽 갑옷의 내구도가 살짝 깎이는 진동이 느껴졌다.
“이 정도 가지고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진우는 피식 웃으며 허리에 찬 한손검을 뽑아 들었다. 낡았지만 길들여진 검은 손에 착 감기는 감각이 일품이었다. 그는 어깨 너머로 자신의 캐릭터, ‘아크’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확인했다. 푸른 불꽃이 검날을 휘감더니, 전방을 향해 맹렬하게 뿜어져 나갔다.
콰아앙!
정교하게 숨겨져 있던 화살 발사대가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경험치 상승을 알리는 녹색 메시지가 팝업되고, 인벤토리에는 고대 유물의 파편 하나가 자동으로 추가되었다. 역시, 『아틀라스의 유산』은 그에게 완벽한 도피처였다. 현실의 팍팍한 삶, 직장 상사의 잔소리, 치솟는 물가 따위는 이 환상적인 세계 앞에서 한낱 먼지에 불과했다.
깊은 숨을 들이쉬며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귓가에 뭔가 스치는 듯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슥…….
마치 얇은 종이가 스치는 듯한 소리였다. 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게임 속 사운드가 이렇게 섬세했던가? 그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신전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나뭇잎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착각이겠지. 잠을 너무 설쳤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게임에 몰두하려던 순간,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스스슥…… 툭.
이번엔 확실했다. 분명히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바로 *내* 옆에서.
진우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은 게임 속 세계에 있지만, 뇌는 방금 들린 소리가 게임 바깥, 즉 현실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는 게임 속 어두운 신전 벽에 기대어 가상현실 헤드셋을 벗지 않은 채 잠시 귀를 기울였다.
고요함.
그의 원룸은 항상 조용했다. 옆집에는 노부부가 살고, 아래층은 늘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소음이 없었다. 그는 이 고요함이 좋았다. 이 고요함 속에서 게임에 몰입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고요함은 조금 달랐다.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압도적인 침묵이었다.
‘뭔가 떨어졌다면, 소리가 더 컸을 텐데.’
그는 다시 조심스레 헤드셋을 벗었다.
칙- 하는 기계음과 함께 가상 세계의 장엄한 풍경이 사라지고, 그의 눈앞에는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옷가지, 빈 컵라면 용기, 그리고 모니터의 희미한 잔상. 그리고 침대 옆 협탁.
진우는 협탁 위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늘 그곳에 두던 물건들, 이를테면 무선 이어폰 케이스나 핸드크림 따위는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긴 했나 보네. 환청까지 들리고.”
그는 다시 헤드셋을 쓰려다가 멈칫했다. 불과 몇 초 전의 일인데, 그 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귓가에 남아있었다. 뭔가 가느다란 물체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결국 다시 헤드셋을 착용했다. 아틀라스 신전의 풍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아직 해결해야 할 퍼즐과 처치해야 할 몬스터들이 잔뜩 남아있었다. 현실 따위는 잊고 다시 모험에 몰두하자.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을까. 진우는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기 위해 거대한 돌문을 열어젖혔다. 육중한 돌문이 천천히 열리며 삐걱이는 소리가 게임 내 스피커를 통해 사실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삐걱이는 소리 뒤에 섞여 들어오는 아주 기분 나쁜, 거슬리는 소음.
드르륵…… 드르르륵……
마치 가구를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진우는 이번에도 게임 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소리는 게임 속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현실 속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번에는 헤드셋을 벗는 손길이 망설여지지 않았다. 빠르게 기기를 벗어던지자,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방문 옆 벽에 붙어있던 액자였다. 가족사진이 담긴, 평범한 액자.
액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른쪽으로 스르륵 밀려나고 있었다.
진우는 숨을 들이켰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액자가, 그의 눈앞에서, 벽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옆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액자 뒤에서 실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뭐, 뭐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뇌가 이 현상을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천천히 액자를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액자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중력을 무시하고, 마찰력을 거부한 채.
그가 액자 앞에 섰을 때, 움직임이 멈췄다. 액자는 본래 있던 자리에서 10센티미터 가량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진우는 떨리는 손을 뻗어 액자를 만졌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액자 뒤에 실이 묶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어떤 조작의 흔적도 없었다. 그는 액자를 조심스럽게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이 그를 노려보는 듯했다. 컵라면 용기, 옷가지, 모니터, 심지어 그의 침대까지. 평범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왔다.
“농담하지 마.” 그는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장난이야? 누가 나한테 장난치는 거야?”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텅 빈 방 안에서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는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인터넷에 ‘액자 움직임’, ‘폴터가이스트’ 같은 단어들을 검색하려던 순간, 손안의 휴대폰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 액정을 보니, 분명히 배터리가 80% 이상 남아있었는데, 갑자기 1%로 급강하해 있었다.
퍼억!
휴대폰은 그의 손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꺼져버렸다.
진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간신히 입을 막고 뒷걸음질 쳤다. 휴대폰은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검은 연기를 피어 올렸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장난도 아니었다.
이건, 뭔가, 정말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눈앞에 놓인 VR 헤드셋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완벽한 도피처였던 그 기기가, 이제는 현실의 공포를 피해 숨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 헤드셋을 통해 도망치는 순간, 이 모든 기괴한 현상들이 그의 존재를 잠식해 올 것만 같은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아파트, 그의 방이,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곳에, 그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막, 그의 존재를 인지한 듯했다.
창밖의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진우의 방 안은 마치 심해처럼 어둡고, 소름 끼치는 고요함 속에 잠겨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