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산맥 깊은 곳, 짙푸른 기운이 어린 봉우리들이 구름을 뚫고 솟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음침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줄기 계곡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잊혀진 계곡’이라 불렀고,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고, 이따금 기괴한 빛이 번뜩인다는 소문 탓이었다.
진우는 그 잊혀진 계곡 초입, 해묵은 바위틈에서 간신히 뿌리를 내린 영지버섯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한 손에는 낡고 닳은 도검을, 다른 손에는 약초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스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고단한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가난한 삶, 이렇다 할 연고도, 뛰어난 재능도 없었던 진우에게 청룡산맥은 유일한 삶의 터전이자 가끔은 좌절을 안겨주는 거대한 존재였다. 그는 여기서 희귀한 약초를 캐내어 간신히 끼니를 잇고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영지버섯이라면, 며칠은 배를 채울 수 있겠어.”
진우는 조심스럽게 버섯을 따내 바구니에 담았다. 그때였다. 숲 속 깊은 곳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몸이 얼어붙을 듯한 맹수의 포효. 단순한 산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진우의 몸에 경고 신호가 울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거대한 그림자가 숲을 가르며 진우에게로 쇄도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진우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핏빛으로 번뜩이는 두 눈, 돌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몸, 그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녀석은 바로 청룡산맥의 지배자라 불리는 ‘광폭한 혈랑’이었다. 평소에는 인간을 피해 다니지만, 한 번 광폭해지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포악한 존재.
“젠장…!”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혈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맹렬하게 추격해왔다. 그 속도는 진우의 상상을 초월했다. 낡은 도검으로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진우는 정신없이 숲 속을 가로질렀다. 거친 나뭇가지가 얼굴을 할퀴고, 발밑의 돌멩이에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움직였다.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잊혀진 계곡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혈랑의 포효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진우는 절박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절벽 아래는 시커먼 어둠만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곳으로 떨어지면 죽음뿐이리라. 하지만 혈랑에게 잡히는 것 역시 죽음이었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살기 위한 유일한 길이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면, 기꺼이 뛰어들 것이었다. 그는 절벽 끝으로 몸을 날렸다. 발아래 허공이 펼쳐졌고, 몸이 중력에 이끌려 추락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떨어지는 순간에도 진우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몸이 벼랑에 부딪히고, 나뭇가지에 걸려 찢겨나갔다.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그의 몸이 거대한 충격과 함께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눈을 뜨자, 익숙한 어둠이 아닌 희미한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은 절벽 아래에 숨겨진 거대한 동굴이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흙과 이끼가 깔려 있었고, 동굴 천장에서는 영롱한 푸른빛을 내는 수정들이 박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여…여기는 어디지?”
진우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쑤시고 피가 흘렀지만,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듯했다. 혈랑에게서 도망치다 떨어진 것이 오히려 그를 살린 셈이었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진우는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빛을 향해 걸어갔다.
동굴의 끝에는 거대한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수십 개의 웅장한 돌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단은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듯 고색창연했지만, 그 위에는 묵직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색 비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비석은 아무런 장식도,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저 매끄럽고 어둡기만 했다. 하지만 진우의 눈에는 그 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파동이 느껴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간을 압도하는 듯한 신비로운 기운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느껴졌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제단 위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비석에 닿는 순간, 차가운 돌덩이라 생각했던 비석에서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와 영상이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고대 문명의 흥망성쇠, 신선들의 이야기, 그리고 무수한 수련법과 비기들.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뼈에 새겨지고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생생한 감각이었다.
“이…이게 뭐야…!”
진우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그의 손은 비석에 단단히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비석은 그의 몸속으로 거대한 에너지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의 몸속에 흐르던 미약한 기운은 순식간에 불어나 폭주하기 시작했다.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온몸의 세포가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격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진우의 몸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검은색 비석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거대한 빛을 뿜어내며 동굴 전체를 비췄다. 비석 표면에 희미하게 감춰져 있던 고대의 문양들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그 문양들은 진우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빛을 발했다.
엄청난 에너지에 진우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무영비공(無影秘功)’이라는 네 글자와 함께,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그 위를 유유히 거니는 신선들의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동굴 안에는 오직 검은 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빛만이 잔잔하게 진우를 감싸고 있었다. 이제 진우의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과연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