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3화: 심연의 울림
어둠이 지배하는 17번 구역의 지하 벙커는 묵직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천장에서 간신히 깜빡이는 비상등만이 습기 찬 벽과 낡은 장비들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눅진한 공기 속에서 모두의 시선은 정면의 대형 전술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크린에는 제7 보급창의 위성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요새화된 철옹성. 제국군의 탐욕과 무자비함을 상징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칸은 굵은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툭툭 쳤다. 그의 얼굴은 깊은 주름만큼이나 무거운 결의로 뒤덮여 있었다.
“계획은 변동 없다. 제7 보급창 내부의 데이터 핵을 확보한다. 성공하면 제국의 다음 보급 루트를 뒤흔들 수 있다. 실패하면…… 우린 여기서 끝장이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긴장감을 극대화시켰다. 누구도 감히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이 작전의 성공 여부에 자신들의 미래가, 아니 이 황폐한 구역 전체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세라는 스크린 옆에 서서 태블릿을 조작했다. 그녀의 눈은 피로로 붉었지만, 총명함은 여전했다.
“제7 보급창은 제국 최정예 ‘섬멸자’ 부대가 주둔하는 곳입니다. 파수꾼 Mk-III 모델이 최소 다섯 대. 그리고…… 감지될 수 없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추가 병력인지, 아니면 다른 변수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감지되지 않는 움직임. 그것은 제국이 감추고 있는 비장의 카드일 수도 있었다.
리온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북처럼 쿵쾅거렸다. 닳고 닳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은 무릎 위에서 가볍게 쥐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스크린 속 제7 보급창의 중심부, 작게 점멸하는 목표 지점에 박혀 있었다.
“리온.” 칸이 리온을 불렀다.
“목표는 데이터 핵이다. 교전은 최소화하고, 최대한 신속하게 침투한다. 네 ‘잿빛 매’가 우리 모두의 희망이다.”
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망설임이나 두려움 대신, 굳건한 의지가 스치고 지나갔다.
“알겠습니다, 칸.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마치 잿빛 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섬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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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장막이 짙게 깔린 17번 구역의 폐허는 음산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낡은 건물 잔해들이 앙상한 그림자를 드리운 길을 따라 리온의 ‘잿빛 매’가 숨죽인 채 움직였다. 고철 더미와 먼지로 뒤덮인 몸체는 위장용 망토 아래 감춰져 있었고, 스텔스 시스템이 작동하며 주변 환경과 완벽하게 동화되어 있었다.
뒤를 따르는 동료들의 구형 전투 기계들, ‘코뿔소’와 ‘광부’도 묵묵히 전진했다. 모두 제국군의 최신 병기에 비하면 조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 안에는 분노와 절망 속에서 피어난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리온의 조종석 안, 푸른빛 스크린에 제7 보급창의 외곽 경계선이 점멸했다.
“목표 1200미터 전방. 적 감지 시스템 활성화.” 세라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흘러나왔다.
“리온, 우측 통로를 이용해. 경비가 가장 허술한 곳이야.”
“알았다.” 리온은 섬세한 조작으로 ‘잿빛 매’의 방향을 틀었다. 그의 기체는 낡고 투박했지만, 리온의 손길 아래서는 마치 살아있는 매처럼 유려하게 움직였다. 웅장한 제국의 병기들이 흉내 낼 수 없는, 피와 땀으로 다져진 움직임이었다.
삐익-!
경보음이 짧게 울렸다. ‘코뿔소’를 조종하는 동료, 덩치 큰 라그나르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정찰병이다! 세라, 네 정보보다 빠르잖아!”
세라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추가 병력이었나?! 리온, 교전해! 시간이 없어!”
리온은 망설이지 않았다. ‘잿빛 매’의 위장 망토가 벗겨지며 기체의 은색 장갑이 드러났다. 길고 날렵한 팔에 달린 고속 기관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작열하는 붉은 불꽃이 어둠을 갈랐다. 불과 50미터 앞, 제국의 경비 메카 ‘감시자’ 두 대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리온의 총탄 세례를 받았다. 철갑탄이 장갑을 찢고 들어가 내부 동력로를 박살 냈다.
펑! 펑!
짧은 폭발음과 함께 두 대의 ‘감시자’가 고철 더미로 변해 바닥에 쓰러졌다.
“진입 성공! 다른 녀석들, 신속하게 후방 지원!” 리온의 지시에 따라 라그나르의 ‘코뿔소’와 다른 ‘광부’가 내부로 돌진했다.
제7 보급창의 내부 구역은 거대한 창고와 복잡한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장 특유의 기름 냄새와 금속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반란군 기체들이 진입하자마자, 제국군 파수꾼 Mk-III 세 대가 나타나 격렬한 저항을 시작했다.
“젠장, 숫자가 너무 많아! 리온, 엄호!”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터져 나왔다.
리온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잿빛 매’는 날렵하게 파수꾼의 시야를 벗어나, 한 대의 뒤를 잡았다. 고속 기관포가 다시 불을 뿜었다.
촤아아악!
파수꾼의 다리 관절부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기체가 휘청거렸다. 리온은 지체 없이 근접 전투용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푸른 에너지를 머금은 블레이드가 파수꾼의 조종석을 한 번에 갈랐다.
쩌적!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파수꾼이 쓰러졌다.
“두 대 처리! 남은 한 대는 맡겨라!” ‘광부’를 조종하는 또 다른 동료, 카이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세라의 경고가 리온의 귀를 강타했다.
“리온! 후방에서 고에너지 반응 감지! 이건…! 이건 ‘흑기사’ 부대다!”
리온의 시야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 멀리, 창고의 입구에서 네 대의 육중한 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검은 장갑, 위압적인 크기, 그리고 어깨에 장착된 거대한 캐논 포. 그것은 제국이 자랑하는 최정예 섬멸 기체, ‘흑기사’였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진동하는 듯했다.
“젠장… 이걸 막으라는 거야?” 라그나르의 목소리에 절망감이 묻어났다.
카이는 이미 남은 파수꾼을 처리했지만, ‘흑기사’의 위압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흑기사’의 한 대가 팔에 달린 거대한 중화기를 리온에게 겨눴다.
휘이이잉-!
충전음과 함께 푸른 에너지탄이 발사되었다.
리온은 본능적으로 ‘잿빛 매’를 옆으로 회피시켰다. 콰아앙! 그의 바로 옆 벽이 엄청난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게… 정말 ‘흑기사’인가? 소문보다 훨씬 강력해!” 리온은 조종석 손잡이를 꽉 쥐었다. 상대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들의 구형 기체로는 정면 대결이 불가능했다.
통신 채널에서 노이즈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고, 오만하며,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찮은 쥐새끼들. 감히 제국의 심장을 긁으려 하는가. 나는 레반 제독이다. 너희의 어리석음을 끝내주러 왔다.”
레반 제독. 17번 구역의 평화를 짓밟고 수많은 생명을 빼앗아간 잔혹한 지휘관. 그의 이름이 리온의 뇌리를 스치자 분노가 치밀었다.
“이건 함정이었어…!” 세라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터져 나왔다. “제독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어! 데이터를 확보하고 후퇴해! 리온, 시간을 벌어!”
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리온, 라그나르, 카이! 데이터 핵 확보 후 즉시 후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데이터는 지켜야 한다!”
‘흑기사’ 세 대가 동시에 리온을 향해 전진했다. 거대한 발걸음이 땅을 울렸다. 리온은 ‘잿빛 매’의 스러스터를 최대로 가동했다. 잿빛 기체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흑기사’들의 포위망을 뚫고 지나갔다.
투콰아앙! 투콰앙!
‘흑기사’들의 연쇄 공격이 리온이 방금 지나간 자리를 초토화시켰다.
“라그나르, 카이! 데이터 핵이 있는 곳까지 길을 터줄게! 서둘러!” 리온은 통신을 통해 외쳤다.
그는 ‘잿빛 매’를 흑기사 한 대의 다리 사이로 급강하 시켰다. 동시에 팔에 달린 블레이드를 휘둘러 다리 관절부에 흠집을 냈다. 흠집은 작았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에 ‘흑기사’는 잠시 휘청거렸다.
그 틈을 타, 라그나르와 카이가 목표 지점으로 향했다.
“제독님, 놈들이 목표 지점으로 향합니다!” ‘흑기사’ 파일럿의 다급한 보고가 레반 제독에게 전달되었다.
레반 제독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여전히 차분했지만, 조롱하는 듯한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아니, 괜찮다. 어차피 그들이 손에 넣을 것은 미끼일 뿐이다. 어리석은 반란군 녀석들. 모든 것은 나의 손안에 있다.”
리온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미끼…!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제독의 계획대로였다는 말인가? 이 살육의 현장마저도 그저 오만하고 잔혹한 제국의 유희였다는 말인가?
뒤이어 엄청난 에너지 파동이 리온을 덮쳤다.
콰아아아앙!
리온의 ‘잿빛 매’는 한 대의 ‘흑기사’가 발사한 캐논포를 정면으로 맞았다.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고, 충격파가 조종석까지 전달되며 리온은 비틀거렸다. 시스템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젠장…! 동력로 40% 손상! 왼쪽 다리 관절 파손!”
하지만 리온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에는 타오르는 분노가 번득였다. 미끼라고? 그들의 목숨과 희망이 제국의 오락거리였다고? 절대 그렇게 두지 않으리라.
“라그나르! 카이! 서둘러! 나는 여기서 놈들을 막는다!” 리온은 부서진 ‘잿빛 매’를 끌고 다시 ‘흑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한 대의 다리가 파손되고, 동력로가 망가졌지만, 그의 기체는 잿빛 유성처럼 맹렬하게 쇄도했다.
세 대의 ‘흑기사’가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리온을 포위했다. 압도적인 화력, 압도적인 기체 성능. 이미 만신창이가 된 ‘잿빛 매’로는 승산이 없었다.
“어리석은 발버둥이군. 곧 너희의 희망도 함께 불타 사라질 것이다.” 레반 제독의 냉혹한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리온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리온은 조종석 디스플레이에 뜨는 ‘치명적 손상’ 경고를 무시했다. 그의 손은 망가진 기관포를 다시 겨눴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오만하게 다가오는 ‘흑기사’ 부대,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였다.
“그래… 불타버리겠지. 하지만… 그 불꽃은 제국을 태울 불씨가 될 거다!”
리온의 잿빛 기체가 마지막 힘을 짜내며 붉은 불꽃을 뿜어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세 대의 ‘흑기사’가 동시에 그에게 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제7 보급창 전체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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