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그림자, 은하리에 드리우다
오래된 버스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멈춰 섰을 때, 서미나는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숨을 삼켰다. 녹음 짙은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그 아래로 은빛 물줄기가 잔잔히 흐르는 강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은하리’. 이름만큼이나 청아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서울의 텁텁한 공기와 지친 소음 속에서 벗어나 이곳으로 도피하듯 내려온 지 겨우 몇 시간. 아직 몸은 도시의 피로를 털어내지 못했지만,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맑은 공기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아가씨, 다 왔어. 얼른 내려.”
운전기사의 무뚝뚝한 한마디에 미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버스에서 내렸다. 낡은 여행용 가방을 끌고 흙먼지 날리는 길 위에 서자, 매미 소리와 풀벌레 울음소리가 합창하듯 그녀를 감쌌다. 저 멀리 낮은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당에는 색색의 꽃들이 한가로이 피어 있었다. ‘따뜻한 시골 마을’. 딱 그녀가 찾던 곳이었다. 복잡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 하나만 붙잡고 내려온 길이었다.
몇 번의 물음 끝에 겨우 그녀가 머물 집을 찾았다. 마을 가장자리에 자리한 작은 한옥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흙냄새 섞인 오래된 나무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작지만 아담한 마당에는 작은 우물이 있었고, 뒤뜰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넉넉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텅 빈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자,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지저귀며 날아갔다. 그래, 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미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순덕 할머니의 시선
짐 정리를 마치고 해 질 녘이 되자,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마을 구경도 할 겸 식료품을 사러 나섰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마을 중심에 다다랐다. 정미소와 오래된 이발소 옆으로 ‘정겨운 상회’라는 간판을 단 작은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 너머로 구부정한 허리의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어서 와요, 아가씨.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어?”
미나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뽀얀 밀가루 냄새와 함께 구수한 간장 냄새가 풍겨왔다. 김순덕 할머니는 두툼한 안경 너머로 미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주름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맑고 형형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미나라고 해요. 저기, 마을 끝집에 새로 이사 온….”
미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그래. 소식 들었지. 서울 아가씨가 이 촌구석에 웬일인가 했더니, 자네였구먼. 먹을 건 있나? 밥은 먹었어?”
할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넉넉한 봉지에 이것저것 담아주셨다. 갓 쪄낸 따끈한 감자떡과 직접 담근 오이 장아찌까지. 정겹다는 상호처럼 할머니는 더없이 따뜻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미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 근데 제가 오면서 보니까, 마을 입구 쪽에 좀 낡고 커다란 집이 하나 있던데… 아무도 안 사는 집인가 봐요?”
미나는 버스에서 내리며 보았던, 왠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을 풍기던 오래된 고택을 떠올렸다. 기와는 깨져 있고, 마당은 잡초로 무성했으며, 창문은 나무판자로 덧대어져 마치 버려진 유령의 집 같았다.
그 순간, 김순덕 할머니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사라졌다. 미나의 질문에 할머니의 눈빛은 순간 차갑게 굳는 듯했다. 할머니는 얼른 고개를 돌려 진열된 물건들을 정리하는 척했다.
“음, 그 집 말이여? 오래된 집이여. 그냥… 아주 오래된 집이지. 아가씨는 신경 쓸 거 없어. 괜히 으스스하기만 하고.”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아져 있었고, 마치 그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를 꺼리는 듯했다. 미나는 직감적으로 할머니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느꼈다. 그 고택에 대한 이야기는 마을에서 금기시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내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서울 아가씨는 이런 촌밥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우리 마을 쌀은 참 맛있어. 아가씨,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했지? 이 풍경 좋은 곳에서 좋은 그림 많이 그려줘.”
할머니의 능숙한 화제 전환에 미나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면서도, 미나의 머릿속에는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그 오래된 고택의 음산한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잊혀진 노랫소리
그날 밤, 미나는 잠자리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도시의 소음 대신 매미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가 고요하게 들려왔다. 창밖으로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문득, 아주 희미한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 같았다. 멜로디는 슬프고도 아름다웠지만,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치 저 먼 과거에서 울려 퍼지는 잊혀진 자장가 같기도 했다. 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밤의 정적 속에서 그 존재감은 뚜렷했다.
미나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귀 기울여보니, 노랫소리는 마을 입구, 그러니까 그 오래된 고택이 있는 방향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할머니가 ‘신경 쓸 것 없다’고 했던 그 집 말이다.
이 밤중에 누가 그 허물어져 가는 고택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그것도 이렇게 구슬픈 곡조를. 미나의 호기심은 두려움을 넘어섰다. 어쩌면 그 노랫소리가 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마을이 감추고 있는 ‘비밀’의 실마리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마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화로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닭 우는 소리, 아침 밥 짓는 냄새. 어젯밤의 노랫소리는 마치 꿈속의 일처럼 아련했다.
하지만 미나는 알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가 꿈이 아니었음을.
그녀는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작은 손전등을 들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어젯밤 노랫소리가 들려왔던 곳, 김순덕 할머니가 침묵했던 그 오래된 고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화로운 은하리 마을에 드리운 알 수 없는 그림자. 그 실체를 향해 미나는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었다.
고택의 낡은 대문이 어둠 속에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