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캡슐의 차가운 금속이 몸을 감쌌다. 익숙한 기계음이 낮게 울리며 현우의 의식은 서서히 현실에서 멀어져 갔다. 눈앞의 인디케이터가 초록색으로 점멸한 순간, 귓가를 맴돌던 기계음은 사라지고, 오직 고요만이 남았다. 이내, 텅 빈 암흑 속에서 텍스트가 떠올랐다.
**[『황혼의 땅』에 접속합니다.]**
**[생체 신호 동기화 중… 100%]**
**[플레이어: 강현우]**
**[접속 완료. 황량한 시작 지점: 재의 협곡]**
현우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황무지였다. 발밑은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과 메마른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다 굳어버린 해골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태양은 핏빛 먼지에 가려져 희미한 붉은 점으로 겨우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사방을 휘감은 침묵은 묵직한 절망을 뱉어내는 듯했다.
“젠장, 또 여기야.”
나지막이 중얼거린 현우는 손목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상태 창]**
**[이름: 강현우]**
**[직업: 없음]**
**[체력: 90/100]**
**[스테미너: 95/100]**
**[허기: 30%]**
**[갈증: 40%]**
시작 지점은 항상 같았다. ‘재의 협곡’.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듯한 곳.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항상 허기와 갈증이 어느 정도 차 있는 상태로 시작하는 것은 현실 세계의 불완전한 육체 상태를 반영하는 듯했다. 그는 지금도 어제 먹은 딱딱한 영양바의 잔존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생존은 언제나 목을 조르는 족쇄였다.
현우는 주위를 둘러봤다. 멀리 시야 끝자락에, 녹슨 철골 구조물과 무너진 건물 잔해가 희미하게 보였다. 저곳은 지난번에 겨우 물 한 모금을 찾았던 폐허였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고, 무엇보다 물은 이미 말라버렸을 터였다.
“움직여야 해.”
건조한 입술을 지그시 깨문 현우는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게임 속의 피로는 현실의 피로와 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잠시라도 쉬면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하지만 쉴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얻는 ‘코인’만이 현실의 그를 지탱할 유일한 수단이었으므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서진 자갈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일한 소음이었다. 붉은 모래바람이 불어와 눈을 찔렀다. 스탯창의 ‘갈증’ 수치가 꾸준히 1%씩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 계속 가면 한 시간도 못 버틸 것이다.
그때였다. 현우의 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 혹은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주변의 부서진 잔해 뒤로 숨었다.
**[경고: 위험 감지. 『황무지 야수』가 접근 중입니다.]**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황혼의 땅』의 초반 몬스터 중 하나. 움직임이 느리고 둔하지만, 육중한 몸으로 들이받으면 초보 플레이어는 한 방에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더러운 발톱에 긁히기라도 하면 ‘감염’ 디버프에 걸려 피와 스테미너가 빠르게 소모되었다.
현우는 잔해 틈새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과연, 흙먼지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사족 보행을 하는 거대한 짐승의 형상.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등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솟아 있었고, 핏발 선 눈은 사냥감을 찾는 듯 매서웠다.
‘빌어먹을. 시작부터 운도 없어.’
현우는 숨을 죽였다. 괜히 싸움을 걸었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더 힘들어질 터였다. 저 짐승은 시체나 작은 동물을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현우가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아마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몇 분 지나지 않았다. 『황무지 야수』는 폐허의 건너편으로 사라져갔다. 그 거친 숨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현우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위험 해제. 『황무지 야수』가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안도하는 한편, 현우는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음을 느꼈다.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위협은 언제나 생생했다. 현실의 삶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 게임에서도 겨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현우는 방향을 틀어 폐허 반대편으로 향했다. 이제는 눈에 띄는 큰 건물 잔해가 없었다. 대신, 길고 깊게 패인 지형이 보였다. 오래된 강바닥일까? 아니면 거대한 폭격의 흔적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아래라면 흙바닥에 고인 물이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들었다.
거친 경사를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발아래의 돌멩이들이 미끄러지며 작은 낙석을 만들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먼지 섞인 붉은 햇빛은 더욱 희미해졌고, 어두컴컴한 골짜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저 멀리 바위 틈새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현우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기이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웅덩이였다. 흙탕물과 먼지가 뒤섞여 탁해진 물 웅덩이. 가장자리는 말라붙은 이끼와 정체 모를 검은 침전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깨끗한 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황무지에서 이것만큼 귀한 것은 없었다.
**[탁한 물웅덩이를 발견했습니다. 마시겠습니까? (갈증 해소, 감염 확률 높음)]**
시스템 메시지가 경고를 보냈다. ‘감염’ 확률. 아까 『황무지 야수』에게 긁히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우는 이미 목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신다.”
현우는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물을 떠서 입술로 가져갔다. 흙냄새와 비릿한 쇠 맛이 났다. 역했지만, 갈증이 이를 압도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탁한 물의 감각은, 척박한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갈증 수치가 20% 회복되었습니다.]**
**[주의: ‘탁한 물 섭취’ 디버프가 적용되었습니다. 10분간 체력 재생이 감소합니다.]**
감염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현우는 남은 물을 조심스럽게 챙겨 온 물통에 담았다. 이 물통 하나가 지금 그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하늘은 더욱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곧 밤이 찾아올 것이다. 『황혼의 땅』의 밤은 낮보다 훨씬 위험했다. 밤에는 더 흉포한 변이체들이 돌아다녔고, 기온은 살을 에는 듯이 떨어졌다.
현우는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잠시 쉴 만한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오늘 밤도, 그는 이 지독한 황야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생존의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