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잿빛 심연의 그림자**
**1장. 먼지 덮인 맹세**
“젠장, 또 이거냐?”
이진은 손안의 낡은 단검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날은 수없이 갈아 닳아 짧아졌고, 손잡이에는 거친 삼베가 너덜너덜하게 감겨 있었다. 이 단검 하나가 그의 전부였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유일한 경계.
창밖으로는 희뿌연 아침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지만, 방 안은 여전히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진은 작고 허름한 탁자에 단검을 내려놓고, 탁자 한편에 놓인 흙투성이 가죽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 속에는 말린 육포 몇 조각과, 쥐똥만큼 남은 마른빵 조각이 전부였다. 이걸로 이틀을 버텨야 한다.
“늦겠다, 이진아! 멍하니 있으면 몬스터가 밥 떠먹여 주더냐!”
밖에서 김광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수 아저씨는 쉰 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베테랑 탐험가였다. 수많은 던전을 드나들며 살아남았지만, 그의 삶 또한 제국의 가혹한 세금과 횡포 앞에선 한없이 왜소했다.
이진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에 단검을 차고, 가죽 주머니를 둘러멨다. 문을 열고 나서자, 싸늘한 아침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마을 어귀에는 벌써 광수 아저씨와 최유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나는 이진보다 두 살 어린 열여덟 살 소녀였지만, 날렵한 몸놀림과 비수 같은 눈빛은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날카로웠다. 그녀는 허리춤에 한 쌍의 단도를 차고 있었는데, 이진의 것보다 훨씬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래도 날은 여러 번 수리했는지 희미한 흔적이 보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잿빛 던전에서 사라졌다. 그날 이후 유나는 말이 없어졌고, 오직 던전 탐험만이 그녀의 삶의 이유가 되었다. 복수심인지, 아니면 그저 죽을 곳을 찾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늦었잖아, 굼벵이.” 유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길고양이처럼 일찍 일어나는 게 미덕은 아니지.” 이진이 맞받아쳤다.
광수 아저씨는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다가 씩 웃었다. “둘이 그렇게 티격태격해도 던전 들어가면 제일 먼저 서로를 챙기면서. 어서 가자. 오늘 제국 놈들이 세금 걷는 날이라, 입구 지키는 병사들 눈매가 더럽게 사나울 거야.”
세금. 그 빌어먹을 세금. 이 단어에 세 명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제국은 던전에서 나오는 모든 전리품에 절반에 가까운 세금을 매겼다. 목숨을 걸고 지하 미궁을 헤매 얻은 보석, 마물의 가죽, 희귀한 약초까지도 제국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남은 절반으로 마을 사람들은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또다시 다음 던전 탐험을 준비해야 했다.
잿빛 마을은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잿더미처럼 쌓인 가난과 절망이 사람들의 얼굴에 깊은 주름을 새겼다. 제국은 드넓은 영토와 화려한 문화를 자랑했지만, 그 이면에는 끝없는 수탈과 억압이 있었다. 수도의 귀족들이 비단옷을 입고 값비싼 술을 마실 때, 변방의 백성들은 썩은 빵 조각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세 사람은 익숙한 길을 따라 잿빛 던전 입구로 향했다. 마을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던전 입구는 거대한 바위산에 뚫린 검은 입구였다. 주변에는 제국군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번쩍이는 갑옷과 창을 들고 건방진 눈빛으로 지나가는 탐험가들을 훑어보았다.
“거기, 멈춰라!” 한 병사가 퉁명스럽게 외쳤다. “던전 출입 허가증 내놔!”
광수 아저씨는 허리춤에서 낡은 가죽 허가증을 꺼내 건넸다. 병사는 그것을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흐음, 잿빛 마을 촌뜨기들인가. 또 어디 가서 쥐꼬리만 한 동전 몇 푼 벌어오려고? 조심해라, 지하엔 너희 같은 것들 뼈나 쌓여가는 곳이니까.”
유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진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쳤다. “신경 쓰지 마. 짖는 개는 무시하는 게 상책이야.”
병사는 그들의 반응을 즐기듯 씨익 웃으며 허가증을 돌려주었다. “좋다, 들어가라. 대신 명심해. 나오는 길엔 모든 전리품 검사를 철저히 할 거다. 숨기려다 걸리면 모가지가 날아가는 줄 알아라!”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병사를 지나쳤다. 광수 아저씨는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와서야 낮게 으르렁거렸다. “개자식들. 지들은 따뜻한 침대에서 발 뻗고 자면서, 남의 피땀을 등쳐먹으니 배가 불렀지.”
이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슴속에도 제국에 대한 분노가 응어리져 있었다. 그의 부모님 역시 던전 탐험 중 실종되었다. 제국은 슬픔에 잠긴 그에게 위로는커녕, 부모님의 미납된 세금을 대신 납부하라고 독촉장을 보냈다. 그때부터 이진은 살아남기 위해 단검을 잡았다.
검은 동굴 입구는 차가운 습기와 흙냄새를 토해내고 있었다. 횃불도 없는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자, 외부의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직 유나가 미리 준비해 온 마법석이 희미한 푸른빛을 내며 앞길을 밝혔다. 잿빛 던전은 오래전 번성했던 고대 문명의 유적과 자연 동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미궁이었다. 제국은 이곳에서 귀한 광물과 마정석을 대량으로 채굴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핵심 자원은 고갈된 지 오래였다. 남은 건 위험천만한 미로와 마물들뿐.
“조심해, 이진. 바닥이 미끄러워.” 광수 아저씨가 앞서가며 말했다. 그의 낡은 전투화가 축축한 바닥을 긁는 소리가 동굴에 울렸다.
유나는 민첩하게 바위를 뛰어넘으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녀의 단도에는 약한 마법이 걸려 있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났다.
“저번보다 더 퀴퀴한 냄새가 나요.” 유나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쥐새끼들이 더 불어난 것 같기도 하고.”
“쥐새끼뿐이면 다행이지.” 이진이 중얼거렸다. 그들의 주 목표는 ‘어둠쥐’나 ‘동굴 박쥐’ 같은 비교적 약한 마물의 가죽과, 구석진 곳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희귀 약초였다. 제국 병사들이 눈독 들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전부였다.
그들은 미로처럼 얽힌 길을 한참 동안 나아갔다. 축축한 벽에서는 이름 모를 버섯들이 자라났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정적만이 흐르는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갑자기 유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멈춰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진과 광수 아저씨는 즉시 자세를 낮추고 주위를 경계했다. 유나는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아요.”
이진은 마법석의 희미한 불빛 너머를 응시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길고 검은 그림자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쥐는 아니었다. 훨씬 크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무언가였다.
“젠장, 동굴 거미인가?” 광수 아저씨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에는 낡았지만 묵직한 철퇴가 들려 있었다.
그림자는 서서히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축축한 바닥을 기어가는 짐승의 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왔다. 단순한 동굴 거미가 아니었다. 덩치가 너무 컸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너무나도 빠르고 교활했다.
“세 마리야.” 이진이 속삭였다. 그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보통 동굴 거미보다 훨씬 커. 그리고… 놈들 등에서 희미하게 붉은 빛이 보여.”
광수 아저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붉은 빛? 설마… 독거미인가? 이 깊이에서 독거미라니!”
독거미는 일반 거미보다 훨씬 위험했다. 맹독을 가지고 있었고, 가죽도 잘 팔리지 않아 기피하는 마물이었다.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거미들은 그들을 발견했고, 놈들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흩어져! 내가 앞에서 막을 테니, 유나는 뒤를 노리고 이진은 약점을 찾아!” 광수 아저씨가 소리쳤다.
세 사람은 동시에 움직였다. 광수 아저씨는 거대한 철퇴를 휘두르며 가장 앞에 나섰고, 유나는 그림자처럼 벽을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이진은 단검을 쥔 채 거미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가장 앞에 있던 독거미 한 마리가 거대한 다리로 바닥을 박차고 광수 아저씨에게 달려들었다. 독액이 뚝뚝 떨어지는 송곳니가 섬뜩하게 빛났다. 광수 아저씨는 노련하게 몸을 피하며 철퇴를 휘둘렀다.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미의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 거미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 순간, 나머지 두 마리가 이진을 향해 돌진했다. 이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놈들의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간신히 몸을 옆으로 틀어 송곳니를 피했지만, 거미의 단단한 다리가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옷이 찢어지며 살점이 드러났다. 다행히 독니에는 스치지 않았다.
“젠장!” 이진은 단검을 휘둘러 거미의 다리 하나를 잘라냈다. 거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때 유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거미의 등 위로 날아올라 한 쌍의 단도를 정확히 놈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거미는 버둥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이제 한 마리만 남았다. 하지만 그 마지막 독거미는 이진과 유나를 노려보며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광수 아저씨가 이미 한 마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였다.
이진은 순간적으로 몸을 낮춰 거미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단검을 거꾸로 쥐고, 재빨리 거미의 배 아래로 파고들었다. 놈의 약점은 단단한 등껍질 아래, 부드러운 배 부분이었다. 거미가 휘청이며 몸을 돌리려 할 때, 이진은 단검을 힘껏 찔러 넣었다.
꾸억! 거미는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기괴한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이진은 단검을 놓지 않고 몸부림치는 거미에게 매달렸다. 놈의 독액이 튀어 주위 바닥을 지글거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거미는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고 축 늘어졌다.
이진은 숨을 헐떡이며 거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거미의 끈적한 체액이 묻어 있었다. 유나는 그에게 달려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아…” 이진은 간신히 대답했다. 팔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광수 아저씨도 남은 한 마리를 처리하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독에 스친 곳은 없냐? 이놈들 독은 꽤 지독하다.”
이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휴, 다행이군.” 광수 아저씨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런 놈들이 이 깊이에서 나오다니. 뭔가 이상하다.”
이진은 거미들의 시체를 훑어보았다. 그들의 등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붉은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뭔가 찜찜했다. 그는 거미의 시체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축축한 바닥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작고 둥근 돌멩이였다.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진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워 올렸다. 차가운 돌멩이에서 미약하게나마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유나가 궁금한 듯 물었다.
광수 아저씨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거미에게서 이런 게 나온다고? 듣도 보도 못했는데.”
이진은 돌멩이를 손에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이 돌멩이는 평범한 마석이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한, 하지만 동시에 기이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들의 등 뒤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앙!
동굴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흙과 돌멩이가 떨어져 내렸다. 세 사람은 동시에 몸을 숙였다.
“뭐야! 지진인가?” 유나가 소리쳤다.
“아니! 이건… 뭔가 무너지는 소리다!” 광수 아저씨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면… 뭔가 터졌거나!”
이진은 돌멩이를 꽉 쥐었다. 굉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굉음이 연이어 울렸다. 동굴 벽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마법석의 푸른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이진은 느낄 수 있었다. 굉음이 울려 퍼지는 방향에서,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이 잿빛 던전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단순한 지진이나 붕괴가 아니었다. 거대한 힘이,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기운이었다.
“이진, 유나! 이쪽이야! 빨리 대피해야 해!” 광수 아저씨가 급히 외쳤다.
하지만 이진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굉음이 들려오는 던전의 더 깊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손안의 검붉은 돌멩이를 쳐다보았다. 마치 이 돌멩이가, 그 굉음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듯이.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제국이 오랫동안 봉인해두었던, 혹은 감추려 했던 어떤 존재가, 지금 이 잿빛 던전의 심연에서 깨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
그리고 그 예감은, 제국이 던전에서 수탈하던 단순한 광물이 아니라, 더 큰 비밀을 감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진실로 이어졌다.
제국은 이곳에서 무엇을 숨기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이 애써 묻어두려던 진실은, 오늘 이 잿빛 던전의 심연에서 비로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진의 가슴속에서 불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희망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어쩌면 이 혼돈이, 제국의 철옹성에 균열을 낼 작은 시작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쾅! 또다시 거대한 진동이 그들을 덮쳤다. 이진은 휘청거리면서도 돌멩이를 놓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