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잿빛 유산

머리 위에는 항상 같은 색의 하늘이 떠 있었다. 회색빛 먼지로 탁하게 뿌옇고, 삭막한 콘크리트 잔해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불쾌한 색. 해는 그저 하늘 어딘가에 존재하는 거대한 빛 덩어리일 뿐, 더 이상 온기를 품지 않았다. 카인은 익숙한 망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닳고 닳은 가죽 장갑이 땀으로 축축했지만, 무감각한 손바닥에는 그마저도 생생한 자극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죽음의 도시를 걷고 있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제 살길을 찾아 헤매었을 번화가. 이제는 뼈대만 남은 건물들이 앙상하게 솟아 있었고, 썩어 문드러진 간판 조각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끔찍한 소음을 냈다. 발밑에는 깨진 유리 파편과 짓이겨진 금속 조각들이 뒹굴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부서지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 소리가 너무도 커서, 혹시나 숨어 있는 잔해가 들을까 봐 카인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젠장, 물 한 모금이라도….”

메마른 입술이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다. 사흘째였다. 변변한 식량은커녕, 더 이상 마실 물도 바닥을 드러냈다. 가방에는 낡은 천 조각과 녹슨 통조림 칼, 그리고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물통 하나가 전부였다. 이런 황무지에서 물은 곧 생명이었다. 며칠 전 발견했던 폐병원 우물은 이미 말라버린 지 오래였고,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식수원인 빗물 웅덩이마저도 오염된 흙탕물뿐이었다.

카인의 시선이 저 멀리 우뚝 솟은 건물에 닿았다. 웅장한 아치형 입구는 먼지에 뒤덮여 있었지만, 기둥마다 새겨진 부조는 여전히 옛 위용을 뽐내는 듯했다. ‘중앙 백화점’. 한때는 이 도시의 번영을 상징했던 곳이었다. 지금은 거대한 무덤처럼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카인의 직감은 그곳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속삭였다. 어쩌면 아직 약탈당하지 않은 구역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남아있어야만 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이 폐허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이 위협이었다. 굶주린 들짐승, 오염된 괴물, 그리고… 동족. 인간만큼 잔혹하고 비열한 사냥꾼은 없었다.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자, 외부의 잿빛 공기와는 또 다른 냉기가 밀려왔다. 천장이 뻥 뚫려 빛이 들어오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공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퀘퀘한 먼지 냄새와 함께 곰팡이 냄새, 그리고 희미한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진열대가 쓰러져 있었고, 깨진 유리 파편들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한때 화려했을 옷가지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싹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카인은 망치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누가 있나?” 그의 목소리가 공허한 공간을 울렸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가 되돌아오는 메아리만이 그를 반겼다.

층계를 따라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에스컬레이터는 진작에 멈춘 지 오래였다. 삐걱거리는 철골을 밟으며 한 층, 한 층 발을 옮겼다. 3층은 가전제품 매장이었던 듯했다. 깨지고 부서진 TV 화면들이 무표정하게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4층은 식료품 코너. 카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이런 곳에 과연 온전한 것이 남아있을까.

썩은 냄새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 냄새 사이로 희미한 금속성 향취가 섞여 있었다. 녹슨 철 냄새, 아니, 피 냄새 같았다. 카인의 신경이 곤두섰다. 망치를 고쳐 쥐고, 천천히 발소리를 죽였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불규칙적이고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카인은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하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었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팔다리, 피부는 축축한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마치 찢어지고 봉합된 조각들을 덧붙인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고, 텅 빈 눈구멍 속에서 붉은 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잔해령’. 이 폐허에서 피어난 증오와 절망의 결정체. 죽은 자들의 영혼이 뒤틀려 육체를 얻은 존재. 이놈들은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력을 탐했다.

잔해령은 썩어가는 선반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섰다. 텅 빈 눈구멍이 카인이 숨어 있는 기둥 쪽으로 향하는 듯했다. 카인은 숨을 멈췄다. 심장이 귀청이 찢어질 듯 뛰었다.

“크르르….”

잔해령의 목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히 자신을 눈치챈 것이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카인은 기둥 뒤에서 뛰쳐나왔다. 망치를 휘둘러 잔해령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쾅!**

금속성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잔해령의 몸체가 휘청거렸다. 잿빛 피부가 찢어지며 시커먼 액체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잔해령은 고통을 느끼는 듯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한 듯, 긴 팔을 휘둘러 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인은 빠르게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잔해령의 손톱은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과 같았다.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찢겨 나갈 것 같았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이놈을 처리하지 못하면 자신이 먹힐 차례였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짧은 순간, 카인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 찼다. 죽음, 생존, 절망, 그리고 미약한 희망. 수없이 많은 잔해령들과 맞서 싸우며 얻은 경험이 본능적으로 그의 몸을 움직였다.

잔해령이 다시 팔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카인의 어깨를 스쳤다. 날카로운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찢어진 옷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카인은 굴하지 않았다. 잔해령의 움직임이 둔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속도와 민첩성으로는 자신이 우위였다.

카인은 잔해령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낮게 자세를 잡고 망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잔해령의 무릎 부분을 찍어 내렸다.

**콰직!**

뼈가 부러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잔해령의 다리가 꺾이며 중심을 잃었다. 비정상적으로 긴 몸체가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순간, 카인은 다시 한번 망치를 휘둘러 잔해령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텅!**

이번에는 훨씬 강한 충격이었다. 잔해령의 머리가 옆으로 꺾였다. 몸이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축축한 잿빛 액체가 바닥을 적셨다. 잔해령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붉은 눈빛이 꺼지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 흉측한 몸체는 서서히 검은 재로 변해갔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잿더미만 남기고 사라졌다.

카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다음 순간 다시 죽음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피로감이 뒤섞여 있을 뿐이었다.

축 늘어진 채 벽에 기댔다. 차가운 벽돌의 감촉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했다. 이 망할 놈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싸워야 했다. 숨 쉬는 것조차 전쟁이었다.

“젠장….”

주머니에서 낡은 천 조각을 꺼내 어깨의 상처를 대충 지혈했다. 별다른 약도 없었다. 운이 좋으면 곪지 않고 낫겠지만, 운이 나쁘면 이대로 열병을 앓다 죽을 수도 있었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잔해령의 재를 뒤로하고, 카인의 눈은 다시 식료품 코너를 향했다. 이 싸움의 대가가 있어야 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쓰러진 진열대와 뜯긴 포장지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쳐 나갔다. 희망은 점점 희미해지는 듯했다. 모든 것이 약탈당하고 망가져 있었다. 그때, 그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생수병. 겉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내용물은 아직 오염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캔으로 된 보존식량 몇 개가 쓰러져 있었다. 기적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 잔해령의 시체에 가려져 있었다. 아마 다른 생존자들은 이미 잔해령을 피해 도망갔거나, 이 구역을 지나쳤을 것이다.

카인은 떨리는 손으로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마개는 단단히 닫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마개를 비틀자,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맑은 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설일 틈도 없이, 카인은 물통째로 입에 털어 넣었다. 시원한 물이 메마른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순간, 온몸에 생기가 돋는 듯했다.

살았다.

작은 물병 하나와 캔 몇 개. 보잘것없는 수확이었지만, 이 황폐한 세상에서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카인은 허리춤에 캔들을 매달고, 남은 물을 아껴 마시며 백화점 밖으로 향했다.

이미 해는 지고 있었다. 잿빛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실루엣은 저물어가는 빛 아래 더욱 거대하고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찢어진 어깨를 스쳤다.

카인은 등 뒤에 있는 백화점을 돌아봤다. 한때는 번영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잔해령과 죽음만이 머무는 곳. 그의 발길은 다시금 알 수 없는 내일로 향했다. 이 끝없는 여정의 다음 목적지가 어디일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잿빛 세상의 유산 속에서 그는 계속해서 걸어 나갈 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오직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