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각의 심연
## 1화. 검은 성모의 눈물
아스가르드 호는 망망한 심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 수십 광년 너머, 죽어가는 푸른 별의 마지막 희망을 싣고. 함선 내부를 채운 건 기계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우주복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선원들의 나지막한 대화, 그리고 이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는 듯한 침묵의 압박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무한한 어둠 속에서, 별들은 저마다의 궤도를 따라 차갑게 빛났다. 그 빛은 때로는 아름다웠지만, 대개는 무한한 고독과 절망을 속삭이는 유령 같았다.
항해사 류신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광년 단위의 좌표, 예측 가능한 중력장, 그리고 변함없는 암흑 물질의 분포. 지루함은 이미 그녀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인류의 마지막 여정이자, 어쩌면 무의미한 몸부림이 될 이 탐사 임무는 벌써 7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콘솔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때였다.
삑, 삑.
아주 미세하게, 평소의 우주 배경 노이즈와는 다른, 규칙적인 파동 하나가 화면 한 구석에 점멸했다. 류신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피로 탓인가? 그녀는 눈을 비볐지만, 파동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스펙트럼 분석 창을 열자, 이전에 본 적 없는, 하지만 명확하게 인공적인 간섭 현상이 감지되었다.
“뭐지?”
류신의 목소리는 절로 낮게 깔렸다. 단순한 우주 현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정교했다. 그녀는 서둘러 심층 스캔을 시작했다. 수백만 킬로미터 너머의 미약한 신호였지만, 탐지 범위 내에 들어온 이상 놓칠 수는 없었다. 데이터가 빠르게 분석창을 채워나갔고, 잠시 후, 그녀의 눈은 경악으로 커졌다.
“캡틴! 캡틴 유진!”
류신의 다급한 외침에 함교의 적막이 깨졌다. 잠시 후, 유진 캡틴이 나타났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과 강렬한 눈매는 그녀의 냉철한 성격을 대변했다.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책임감은 그녀의 표정에서 단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무슨 일인가, 류 항해사? 이런 일로 내 잠을 깨웠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류신은 잔뜩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죄송합니다, 캡틴. 하지만…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미확인 에너지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스펙트럼 분석 결과, 자연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유진 캡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류신의 어깨 너머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패턴의 그래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정체불명? 허튼소리 말고, 확실한 정보만 보고해.”
“데이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신호는 특정 주기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기는…” 류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능적인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유진 캡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인류가 수십 년간 우주를 헤매며 찾던 것은 바로 ‘지능적인 구조’였다. 살아남기 위한 희망, 어쩌면 지구를 버리고 떠나온 인류가 마주할 첫 번째 외계 문명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진행 방향과 거리, 그리고 예상되는 특이점까지의 접근 시간을 계산해.”
“네, 캡틴!”
류신은 재빨리 콘솔을 조작했다. 분석된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화면에 떴다.
“현재 위치에서 약 0.7 광년. 아스가르드 호의 현재 속도로는 3개월 24일 소요됩니다.”
유진 캡틴은 턱을 어루만졌다. 3개월 24일.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 무한한 어둠 속에서 7년을 헤맨 것에 비하면 찰나와 같았다.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기관장 박철수, 보안팀장 김한솔, 그리고 의료팀장 리사. 즉시 함교로 소집해.”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명의 핵심 인물들이 함교에 모였다.
“미확인 신호라고요? 드디어 뭔가 찾는 겁니까, 캡틴?” 기관장 박철수의 얼굴에는 피곤함 속에서도 기대감이 비쳤다. 덥수룩한 수염은 그의 고집스러움을 짐작하게 했다.
“확실치 않습니다, 박 기관장. 하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유진 캡틴은 류신이 분석한 데이터를 모두에게 공유했다. “우리는 이 신호를 따라 이동할 겁니다. 이 신호가 우리가 찾던 것이든, 아니면 단순히 우주의 미스터리이든, 진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보안팀장 김한솔은 묵묵히 데이터를 살펴보았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만약 적대적 존재라면요? 7년간 항해하며 우리의 방어 시스템은 많이 노후화되었습니다. 대규모 교전은 위험합니다, 캡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겁니다, 김 팀장. 우리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할 겁니다. 리사 팀장, 혹시 이 신호가 생명체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예측은 없습니까?”
의료팀장 리사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파동의 주기가 인간의 뇌파와 일부 공명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직접 분석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의는 길어졌다. 우려와 희망이 교차하는 토론 끝에, 결국 유진 캡틴은 ‘접근’을 결정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위해, 그들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심연 속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
3개월 24일은, 마치 3시간 24분처럼 흘러갔다. 모두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고, 함선 내부의 공기는 긴장으로 무거웠다. 예상 지점에 근접하자, 류신이 다시 외쳤다.
“캡틴! 전방 3만 킬로미터 지점! 육안으로 관측 가능합니다!”
유진 캡틴은 조종간을 잡아쥔 채 전방의 주 모니터를 응시했다. 어둠 속,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육중한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빛을 가리는 거대한 암석 덩어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 실체는 모두의 숨을 멎게 했다.
그것은 소행성이 아니었다. 검은 벨벳 천에 박힌 완벽한 흑요석 주사위처럼, 거대한 정육면체 형상의 구조물이었다. 표면은 그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심연의 색을 띠고 있었다. 소행성이라기엔 너무도 정교하고, 인공물이라기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였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아스가르드 호를 마치 한낱 먼지처럼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게… 뭐야?” 박철수가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센서에 잡힌 데이터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인공물입니다, 캡틴.” 류신의 목소리에는 경외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크기의 구조물을 만든 문명이라면…” 김한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구의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해도 저런 규모의 구조물을 우주에 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진 캡틴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응시했다. 마치 누군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묘비 같았다. 혹은 망각의 신이 흘린 검은 눈물처럼.
“접근 속도를 최저로 낮춰. 모든 에너지 방출을 최소화하고, 모든 비상 절차를 활성화해.” 유진 캡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탐사선을 내보낼 준비를 해.”
그녀의 명령에 따라 아스가르드 호는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에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수천 킬로미터, 수백 킬로미터…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것의 위용은 더욱 거대하게 다가왔다. 표면에는 아무런 문양도, 어떠한 입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완벽하게 매끄러운 검은 벽뿐이었다.
그때, 리사 팀장이 비명을 질렀다. “캡틴! 생체 신호가… 제 모든 센서가 먹통이 되고 있습니다!”
함선 내부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깜빡거렸다.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모니터 화면에는 알 수 없는 에러 코드들이 폭주하듯 떠올랐다.
“이게 무슨 짓이야! 시스템이 망가지잖아!” 박철수가 다급하게 콘솔을 두드렸다.
바로 그때, 류신이 서 있던 조종석 콘솔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류 항해사!” 유진 캡틴이 소리쳤다.
류신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새하얀 흰자만 드러났다. 그녀의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 언어는 억겁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비명처럼 들렸다. 그녀의 몸은 이상하리만큼 뒤틀렸고,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인형처럼 격렬하게 떨렸다.
“도와줘! 류신을 잡아!” 김한솔이 외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류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거대한 정육면체에서 미약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그 진동은 아스가르드 호 전체를 흔들었고, 선원들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진동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류신의 몸에서 검은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정육면체를 향해 뻗어나갔다.
마치, 거대한 외계 유물이 류신을 매개로 하여 아스가르드 호와 소통하려는 듯이.
유진 캡틴은 이를 악물었다. “이 빌어먹을!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 순간, 거대한 정육면체의 완벽하게 매끄러웠던 표면 한가운데가 마치 물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검은 물결이 퍼져나가더니, 그 중심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더욱 깊어진 공간, 마치 블랙홀의 입구와도 같은 거대한 구멍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십억 년의 망각이 응축된 듯한 싸늘하고 음산한 기운이 아스가르드 호를 향해 뿜어져 나왔다.
아스가르드 호는 그 거대한 심연의 입구로,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류신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그 말은 이제 유진 캡틴의 뇌리 속으로 파고들어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기억하라… 너희는 그저 씨앗일 뿐…*
어둠이 아스가르드 호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