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도시의 그림자
삭막한 빌딩 숲 사이로 핏빛 노을이 길게 드리워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운 고층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찔렀고, 그 아래 펼쳐진 도시는 거대한 폐허 그 자체였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건 먼지와 부패한 쇠 냄새, 그리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기분 나쁜 짐승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강진은 무너진 고가도로 잔해 위에 쪼그리고 앉아 아래를 굽어봤다. 낡은 방독면이 그의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열악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건 잊혀진 문명의 잔해들. 파손된 차량들이 거대한 돌무더기처럼 뒤엉켜 있었고, 거리 곳곳에는 불타다 만 흔적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검붉은 얼룩들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젠장, 예상보다 멀리 나왔잖아.”
그의 낮은 중얼거림이 방독면 필터를 통해 텁텁하게 새어 나왔다. 이번 탐색은 제법 깊숙한 곳까지 이어졌다. 며칠 전, 라디오에서 간신히 잡힌 잡음 섞인 신호가 이곳 어딘가에 귀한 부품이 있을 거라 암시했기 때문이었다. 폐기된 드론의 비행 제어 장치. 운 좋게 손에 넣기만 한다면, 이 썩어가는 지옥에서 한 발짝 더 멀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될 터였다.
그는 옆구리에 찬 낡은 권총 손잡이를 꽉 쥐었다. 탄창 안에는 고작 아홉 발의 총알이 전부였다. 칼날처럼 벼려진 식칼과 가스토치, 그리고 그의 등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투박한 배낭이 전 재산이었다.
해가 완전히 기울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다. 밤이 되면 이 도시의 그림자는 더욱 깊어지고, 그 속에서 기어 나오는 것들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강진은 조심스럽게 고가도로의 낡은 철근을 밟고 아래로 내려섰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고요한 폐허에 울려 퍼질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았다. 벽에 엉겨 붙은 검은 덩굴, 부서진 건물 틈새로 스며 나오는 정체 모를 녹색 빛, 그리고 간간이 발견되는 뼈다귀들. 그의 모든 감각은 최대치로 곤두서 있었다.
낡은 상점가가 보였다. 간판은 거의 다 떨어져 나갔고, 유리창은 모조리 깨져 있었다. 강진은 그중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약국의 셔터 앞에 섰다. 삐딱하게 열린 틈 사이로 안을 확인하려는데, 등 뒤에서 불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이이익…
마치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강진의 몸이 본능적으로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솟구쳤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담벼락 뒤편에서 세 마리의 ‘크리퍼’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부는 썩은 나뭇가지처럼 검고 거칠었으며,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팔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희번덕거리는 눈은 녹색으로 빛났고, 찢어진 입에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아나 있었다. 놈들의 등에는 비대한 혹 같은 것이 솟아 있었는데, 그 안에서 불쾌한 액체가 부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젠장, 하필 지금…”
강진은 이를 악물었다. 크리퍼는 민첩성과 독성을 겸비한 꽤나 까다로운 상대였다. 특히 저 등 뒤의 혹에서 뿜어내는 부식성 액체는 강철도 녹일 정도였다.
한 마리가 먼저 공격했다.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지르며 길다란 팔을 휘둘렀다. 강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어 공격을 피했다. 팔이 스쳐 지나간 벽돌 기둥이 마치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믿을 수 없는 괴력이었다.
강진은 재빨리 권총을 뽑아 들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귀청을 찢는 총성과 함께 한 마리 크리퍼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녹색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하지만 남은 두 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악!”
두 번째 크리퍼의 발톱이 그의 팔뚝을 스쳤다. 보호구 위로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방독면 너머로 놈의 썩은 내 나는 숨결이 느껴졌다. 강진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다른 크리퍼의 다리를 향해 총을 쐈다.
탕! 탕!
두 발이 연달아 박혔지만, 놈은 그저 휘청거릴 뿐 쓰러지지 않았다. 크리퍼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급소에 정확히 명중시키거나, 심장을 파괴해야만 확실히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코앞에서 난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정확한 조준은 불가능했다.
강진은 약국 셔터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부서진 가구와 진열장 조각들이 발에 밟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크리퍼들도 좁은 틈으로 몸을 구겨 넣으며 그를 따라 들어왔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
그는 안쪽 벽에 기대며 숨을 골랐다. 권총 탄창에는 이제 다섯 발만 남아있었다. 무모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이 약국 안쪽에 널브러진 약품 용기들과 천장에서 겨우 매달려 있는 낡은 전선 뭉치를 발견했다.
강진은 재빨리 칼을 뽑아들었다. 전선 뭉치를 향해 칼을 던지자, 칼날이 정확히 전선을 끊었다. 끊어진 전선은 바닥에 뒹굴던 약품 용기 더미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약국 내부를 비추던 비상등이 깜빡이더니 완전히 꺼졌다.
순식간에 약국 안은 암흑에 휩싸였다. 크리퍼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 강진은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그는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거친 숨소리, 녀석들의 불쾌한 울음소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듯한 발소리.
그는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둔 섬광탄을 꺼냈다. 이 작은 폭탄은 한 번 사용하면 끝이었다.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려야 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녀석들이 그의 위치를 더듬어 찾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강진은 섬광탄의 안전핀을 뽑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힘껏 던졌다.
파앗!
눈을 찌르는 듯한 강력한 섬광이 약국 안을 뒤덮었다. 동시에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리퍼들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섬광에 더욱 치명타를 입었을 터였다.
강진은 눈을 감은 채 권총을 겨눴다. 섬광이 사라지기 전에, 놈들이 시야를 회복하기 전에 끝내야 했다.
탕!
첫 번째 총성이 울렸다. 그는 소리에 의존해 한 마리의 심장을 정확히 노렸다. 놈의 몸이 허공에서 경련하듯 튀어 올랐다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탕!
다시 한 발. 남은 한 마리의 머리를 향해 발사했다. 비명소리가 완전히 끊겼다.
안전했다. 강진은 권총을 거두고 주변을 살폈다. 흙먼지와 녹색 피, 그리고 독특한 비릿한 냄새가 가득했다. 그의 팔뚝에서는 여전히 통증이 느껴졌다. 찢어진 보호구 아래로 붉은 상처가 길게 그어져 있었다. 부식성 액체에 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아… 젠장.”
강진은 거친 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크리퍼들의 시체는 빠른 속도로 흙먼지처럼 부패하여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이 게임의 시스템이 가진 기묘한 특성 중 하나였다.
잠시 심장을 진정시킨 후, 강진은 다시 일어섰다. 이곳에 머무를 시간은 없었다.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약국 안을 둘러봤다. 바닥에는 부서진 진열장과 약품 용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약국 한켠에 쓰러져 있는 금고처럼 보이는 낡은 철제 상자에서 멈췄다.
“이건… 뭐지?”
금속 탐지기가 반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귀한 부품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발걸음이 그 상자를 향했다. 낡고 녹슨 상자 표면에는 희미하게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문양.
강진은 상자를 열어보려 했지만, 굳게 잠겨 있었다. 그는 칼을 사용해 잠금장치를 해제하려 시도했다. 찰칵! 예상외로 쉽게 잠금장치가 풀렸다.
상자 안에는 낡은 종이 뭉치와 함께 닳고 닳은 가죽 수첩이 들어있었다. 종이 뭉치는 오래된 지도 같았는데,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가죽 수첩. 강진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쳤다. 낡은 종이에서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났다.
첫 페이지에 잉크로 휘갈겨 쓴 글씨가 보였다.
「기록… 2077년 10월 23일…」
날짜 아래로 이어지는 내용은 빼곡한 연구 기록과 함께, 어떤 실험에 대한 언급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희미하게 스케치된 그림과 함께 알 수 없는 좌표가 적혀 있었다.
「이곳은 안전하지 않다. 우리는… 새로운 피난처가 필요하다. 마지막 희망은… 『심층구역』에 있다.」
심층구역? 강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폐허가 된 도시에도 알려지지 않은 구역이 또 있다는 말인가? 지도에 표시된 좌표는 현재 그의 위치에서 꽤 멀리 떨어진, 도시의 가장 깊숙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은 지금까지 누구도 탐사하려 하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이었다.
문득, 그의 귀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쓰으윽… 쓰으윽…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질질 끌려오는 듯한 소리였다. 방금 전 크리퍼들과는 확연히 다른, 훨씬 더 육중하고 위압적인 움직임이었다. 진동이 바닥을 타고 발끝까지 전해져 왔다.
강진은 급히 수첩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고개를 들었다. 약국 출입구가 더욱 어둡게 그림자졌다.
거대한 형체가 셔터를 완전히 가린 채 서 있었다. 크리퍼보다 두 배는 더 큰 몸집, 딱딱한 껍질로 뒤덮인 전신, 그리고 붉게 타오르는 듯한 섬뜩한 눈동자.
‘데시메이터…!’
가장 피하고 싶었던 괴물이었다. 단단한 껍질은 웬만한 총알은 튕겨냈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모든 것을 부쉈다. 그의 권총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데시메이터는 느릿하게 고개를 강진 쪽으로 돌렸다. 녀석의 눈빛이 그를 꿰뚫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녀석의 몸체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강진은 본능적으로 식칼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발광하듯 뛰어댔다.
그 순간, 데시메이터의 등껍질이 기괴하게 열리더니, 그 안에서 수십 개의 붉은 촉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촉수 끝에는 날카로운 바늘들이 돋아나 있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폐허가 된 약국은 그에게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강진은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언제나 그랬듯 다시 한번 이를 악물어야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