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참치캔 한 조각의 대의명분**
“망할, 이놈의 먼지는 씻어도 씻어도 끝이 없네.”
유나는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쓱 닦아냈다. 반투명한 방진 마스크 너머로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삭아가는 철근의 비릿한 향이 뒤섞여 들어왔다. 여기가 한때 ‘에브리데이 마트’라는 번지르르한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뼈대만 남은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일 뿐이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햇살이 무너진 천장 틈새로 겨우 스며들어 거미줄과 먼지 가득한 공간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보급품 목록에 참치캔이 우선순위 1번이었어, 유나 씨. 집중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지훈의 목소리는 이런 지옥 같은 폐허에서도 묘하게 차분했다. 언제나 평온한 저 목소리가 유나는 가끔 짜증이 났다. 저 평온함은 타고난 건지, 아니면 이 모든 상황에 이미 무감각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은 하루하루가 서바이벌 게임의 최종 라운드 같았는데 말이다.
“알았다고, 알았어. 그놈의 참치캔 참치캔…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게 참치캔이지, 안 그래?”
유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손전등을 휘휘 저으며 잔해 속을 헤집었다. 녹슨 선반 틈새, 널브러진 상자 더미, 썩어 문드러진 의류들 사이를 헤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야는 온통 폐허의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쪽은 통조림 코너였던 것 같은데? 어, 봐봐! 참치캔이다!”
녹슨 선반 틈새로 겨우 빛이 닿는 곳에 찌그러진 참치캔 몇 개가 보였다. 어쩌면 녹이 슬고 찌그러졌을지언정, 안의 내용물은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의 상징들이었다.
유나가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지훈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났어.”
지훈은 손전등을 끈 채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어둠 속 저편을 향해 있었다.
“소리? 쥐새끼겠지. 여기 쥐떼는 전성기 홍대 클럽보다 많을 걸.”
유나는 피식 웃었다. 쥐는 이 폐허 세상의 가장 흔하고도 짜증 나는 동반자였다. 비록 가끔은 사람의 손가락만 한 녀석들이 나타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쥐는 쥐였다.
“아니, 뭔가 달라. 발소리가… 좀 더 무거워.”
지훈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유나는 그의 말에 어딘가 모르게 으스스함을 느꼈다. 지훈은 어지간해서는 동요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가 ‘뭔가 다르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뭔가 다른 것이 나타났을 수도 있었다.
쿠구궁!
천장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썩은 나무판자가 삐걱이며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쿵, 쿵, 쿵. 마치 둔탁한 심장 소리처럼 울렸다.
“젠장, 쥐새끼 치고는 몸무게가 꽤 나가네?”
유나는 허리춤의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이빨 빠진 나이프였지만, 최소한의 호신용으로는 충분했다. 적어도 평범한 쥐떼에게는 말이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며 나타난 것은… 쥐는 쥐인데, 좀 많이 이상한 쥐였다.
송아지만큼 거대한 몸집, 털은 군데군데 빠져나가 흉측한 피부가 드러나 있었고, 이빨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코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마트의 어둠 속에서 녀석의 실루엣은 악마처럼 보였다.
“돌연변이 쥐…”
유나가 이를 악물었다. 한때 귀여운 마스코트였을 이 동물들이 세상이 뒤집힌 후 어떻게 변이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선 이 기괴한 존재들을 피하거나, 싸워서 이겨야 했다.
“네가 말한 ‘뭔가 다른’ 게 이거였냐?”
유나가 잔뜩 날 선 목소리로 지훈에게 쏘아붙였다. 지훈은 여전히 벽에 바싹 붙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니까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들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아니, 이 상황에 지금 나한테 잔소리를 할 타이밍이야? 저 녀석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눈을 번뜩이고 있다고!”
돌연변이 쥐가 으르렁거리며 좁은 통로를 막아섰다. 녀석의 덩치에 비해 움직임은 민첩했다. 거대한 앞발을 번쩍 들어 올리자, 날카로운 발톱이 공기를 갈랐다. 녀석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분명 자신들의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어쩌지? 저 녀석… 냄새를 맡은 것 같아.”
지훈이 중얼거렸다.
“네 입에서 나는 통조림 냄새겠지! 아니면 며칠째 안 씻은 우리 냄새거나! 젠장, 저 녀석은 아무리 봐도 한 방에 보내기 힘든 상대라고!”
유나는 나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정면승부는 무리였다. 저 거대한 덩치를 상대로는 그녀의 나이프는 겨우 이쑤시개 수준이었다.
그때, 지훈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한쪽을 응시했다.
“유나 씨, 저기 저 선반!”
그가 가리킨 곳은 삐걱거리는 녹슨 선반 위에 위태롭게 놓인 낡은 카트였다. 한때는 쇼핑객의 짐을 싣고 매장을 누볐을 카트가 이제는 언제 떨어질지 모를 흉기로 변해 있었다.
“지금 그걸…?”
유나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지훈의 머리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항상 기상천외한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잔소리가 많고 깐깐한 건 인정하지만, 위기 대처 능력만큼은 최고였다.
“좋아, 네 머리 쓰는 건 인정해 줄게. 하지만 실패하면 네가 저 녀석 밥이다!”
“하나, 둘, 셋!”
지훈의 신호와 동시에 유나가 재빠르게 선반을 발로 걷어찼다. 콰당! 무너지는 선반과 함께 카트가 엄청난 소음을 내며 돌연변이 쥐에게로 굴러떨어졌다. 쥐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잠시 주춤했다. 거대한 카트가 녀석의 앞발을 덮쳤는지,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굴렀다.
“지금이야! 빨리!”
지훈이 유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달렸다. 쥐의 기괴한 비명 소리가 뒤에서 따라오는 듯했지만, 다행히 카트와 무너진 선반이 잠시 시간을 벌어주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건물 밖으로 나와 햇볕 아래 섰을 때,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잿빛 먼지로 뒤덮인 건물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 황폐한 거리.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은 지친 몸을 더욱 피로하게 만들었다.
“하아… 하아… 진짜 미쳤냐? 카트 하나로 저 덩치를 막을 생각을 하다니.”
유나가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심장이 여전히 발광하듯 뛰어댔다.
“성공했잖아.”
지훈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작은 흙먼지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그의 옷은 여전히 비교적 깨끗했다. 저 완벽주의는 이 세상에서 대체 어떻게 유지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나 아니었으면 참치캔만 보다가 쥐 밥이 됐을 걸.”
“흥! 내 나이프 실력을 못 봐서 하는 소리겠지. 네가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했을 거라고!”
유나는 발끈했지만, 사실 지훈의 기지가 없었다면 꽤나 고전했을 것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돌연변이 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찌그러진 참치캔 세 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수확은 나쁘지 않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참치캔이라니, 꽤 괜찮은 보급품이야.”
지훈이 묵묵히 캔 하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캔을 유심히 보더니 중얼거렸다.
“유통기한이… 2년 지났네. 괜찮을까?”
유나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야, 이 세상에 유통기한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살아있으면 감사한 거지.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 거야. 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치캔’이라는 이름으로 이만큼의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흙먼지 가득한 길을 앞서 걷기 시작했다. 지훈은 그런 유나의 뒷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따라 나섰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방금 전에는 꽤 멋있었다고, 인정해 줄게.”
유나가 뒤돌아보지 않고 툭 던지듯 말했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인정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지훈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유나의 뒤를 따랐다. 붉게 물드는 황폐한 노을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피식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 어쩌면 작은 희망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희망은 엉뚱하게도, 으르렁거리는 돌연변이 쥐떼와 2년 지난 참치캔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