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계무도대회, 천외천(天外天) 경기장.
무한히 뻗어 나가는 오색찬란한 홀로그램 빛이 거대한 돔형 천장을 수놓았다. 수백 개의 성계에서 모여든 관중들의 함성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찰나의 순간, 그 모든 소음은 일제히 정지했다. 거대한 링을 감싸는 불투명한 에너지 필드가 서서히 투명해지며, 그 안의 두 인영을 드러냈다.
나는 관중석 가장 높은 곳, 차가운 금속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내 차례는 아직 멀었지만, 오늘 이 대결이 이번 대회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링 중앙에 선 두 고수의 기운은 극명하게 달랐다.
한쪽은 ‘강철룡’이라는 이명답게 온몸을 기계화된 근육과 사이버네틱 코어로 감싼 진이었다. 그의 강철빛 피부는 전신을 뒤덮은 인공장기 네트워크를 통해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었고, 팔다리는 최첨단 합금으로 이루어진 강화 골격이었다. 등 뒤에는 소형 플라즈마 추진기가 내장되어 있어 공중 도약 시 엄청난 가속을 더해줄 터였다. 그는 마치 살아있는 전함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섬광을 띠며 상대방을 꿰뚫어 볼 듯 번득였다.
“흥, 계집이라니. 한시라도 빨리 끝내주마.”
진의 목소리는 금속성 잡음이 섞여 거칠게 울렸다. 조롱 섞인 말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오직 승리에 대한 확신만이 가득했다.
그의 맞은편에 선 것은 ‘영자 권사’ 린이었다. 그녀는 진과는 대조적으로 가볍고 유연한 무복을 입고 있었다. 몸을 감싼 것은 첨단 섬유였지만, 그 아래로 느껴지는 것은 순수한 육체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영자 에너지의 기운이었다. 푸른색 영자(靈子)의 아우라가 그녀의 주위를 옅게 감싸고 있었고,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무성한 흑발은 링의 미풍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입만 살아있는 자는, 언제나 먼저 쓰러지더군.”
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진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은 마치 고요한 호수 같았다. 하지만 그 심연에는 폭풍 같은 집중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영자 권법은 예측 불가능한 변칙과 파괴력을 겸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기장 상공에 거대한 홀로그램 타이머가 떠올랐다. ‘카운트다운: 5, 4, 3, 2, 1…’
‘파이팅!’이라는 기계음과 함께 타이머가 사라지자, 먼저 움직인 것은 강철룡 진이었다.
콰아앙!
그의 육중한 몸이 링 바닥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등 뒤의 플라즈마 추진기가 맹렬한 불꽃을 뿜어내며 그를 일순간 린의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린을 덮쳤고, 진의 주먹은 마치 운석처럼 그녀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 속도와 질량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하찮은 잔재주로는 내 강철을 뚫을 수 없다!” 진이 포효했다.
하지만 린은 허둥대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푸른빛 영자 에너지가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증폭하며, 링 바닥에 거대한 영자 문양을 새겼다. 동시에 그녀의 몸은 마치 액체처럼 유연하게 흐느적거리며 진의 일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진의 주먹이 닿은 링 바닥에서는 거대한 충격파가 울려 퍼졌고, 특수 합금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움푹 파였다.
린은 진의 옆구리를 노리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 영자 권기가 번개처럼 뻗어 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타래가 진의 옆구리를 칭칭 감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진은 비웃었다. “어림없는 수작!”
그의 사이버네틱 골격은 영자 권기를 느끼자마자 즉각적으로 방어 에너지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린의 권기가 진의 옆구리에 닿는 순간, 쨍강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진의 몸은 살짝 밀려났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역공을 준비했다.
“겨우 이 정도인가! 실망스럽군!”
진은 뒤로 물러서며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팔뚝에 내장된 대포형 플라즈마 캐논이 빠르게 충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윙- 지잉-! 푸른 플라즈마 에너지가 포구에 응축되기 시작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초반부터 저런 무기를 사용하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은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전략을 즐겨 썼지만, 린의 영자 권법이 생각보다 더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강철룡의 ‘멸신포’다!” 관중석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멸신포는 전술 병기급 위력을 가진 진의 필살기 중 하나였다. 어지간한 보호막은 한 방에 꿰뚫어 버리는 파괴력을 자랑했다. 린의 영자 방어가 버틸 수 있을까?
린은 진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두 눈은 푸른빛으로 더욱 깊게 물들었다. 마치 우주를 담은 듯한 눈동자였다. 그녀의 발밑 영자 문양이 더욱 선명해지며, 링 전체가 그녀의 기운에 휩싸이는 듯했다.
“크하하! 네년의 잘난 영자도 이 파괴력 앞에선 먼지가 될 뿐!”
진이 발사 버튼을 누르자, 두 개의 푸른 플라즈마 광선이 린을 향해 미사일처럼 날아갔다. 엄청난 열기와 속도로 링의 공기가 일그러졌다.
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양손이 허공에서 느릿하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링 바닥에 새겨졌던 영자 문양이 빛을 발하며 거대한 보호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영자 방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다중 영자 파동을 이용한, 눈에 보이지 않는 거울 같았다.
콰아아앙!
플라즈마 광선이 보호막에 부딪혔다. 예상과는 달리 폭발음은 작았다. 대신, 광선은 마치 투명한 벽에 튕겨 나간 것처럼 원래의 궤적을 벗어나 좌우로 흩어졌다. 린이 형성한 다중 영자 파동 보호막은 플라즈마 광선의 에너지를 왜곡시켜 그 방향을 전환시킨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진은 경악했다. 자신의 필살기가 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휘어지는 것을 본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영자 권법은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데 탁월했다. 진이 잠시 당황하여 자세를 흐트러뜨린 찰나, 린은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이 한 발짝은 평범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일순간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마치 여러 개의 잔상이 동시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듯했다. 영자 순간이동, 혹은 육체를 영자화하여 공간을 건너뛰는 고유의 비술이었다.
진은 뒤늦게 섬뜩한 기척을 느꼈다. 쿵! 그의 등 뒤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린이 진의 등 뒤에 나타나 그의 사이버네틱 코어를 향해 손바닥을 내리쳤던 것이다.
“영자… 파동권!”
린의 손바닥에서 푸른 영자 에너지가 격렬하게 진동하며 진의 강철빛 몸속으로 침투했다. 강철룡의 몸이 거대한 충격에 휘청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빨간 에러 메시지가 번쩍였다. 사이버네틱 코어의 방어막이 한계를 넘어섰다는 경고였다.
“커헉!”
진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내부의 충격에 신음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린의 영자 파동은 그의 내부 에너지 회로를 교란하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린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훨씬 느려지고 둔해져 있었다.
린은 빙글 돌며 진의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영자 파동을 모아 진의 가슴팍을 향해 권을 뻗었다.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이게 끝이 아니다!”
진은 악에 받친 표정으로 오른팔의 사이버네틱 골격을 최대로 확장했다. 그의 팔이 기계적으로 변형되며 거대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동시에 내부에서 비축된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의 붉은 눈이 광기에 번뜩였다.
린의 권이 진의 확장된 팔 보호막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콰아아앙!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폭발음이 링을 뒤흔들었다. 강렬한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이며, 링 전체가 거대한 에너지의 격류에 휩싸였다.
관중들의 탄성과 비명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에어 커튼이 링 위로 펼쳐지며 에너지를 흡수했지만, 나는 링 안의 섬광을 뚫고 두 고수의 결말을 보려 애썼다.
섬광이 걷히고, 링 위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그 안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릎을 꿇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진이었다. 그의 강철빛 몸은 곳곳이 일그러지고 금이 가 있었으며, 사이버네틱 코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필살기마저 뚫어낸 린의 영자 파동은 그의 모든 방어 체계를 파괴한 듯했다.
하지만 린 역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진에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지만,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푸른 영자 아우라는 거의 사라졌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마지막 일격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듯, 그녀의 기운은 크게 소진되어 있었다.
나는 침묵했다. 누가 이긴 것인가? 혹은, 누가 버틴 것인가?
그때였다. 진의 몸에서 갑자기 붉은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의 사이버네틱 코어가 비정상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폭의 징조였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모두 폭발시켜 상대를 함께 끌고 가려는 강철룡의 광기 어린 선택이었다.
“크아아악! 네년만은… 절대 혼자 살려두지 않아!”
진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의 몸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린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예상치 못한 광기였다. 그녀의 몸은 이미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한 상태였다. 이 거대한 자폭 에너지를 막아낼 힘이 그녀에게 남아있을까?
경기장 전체에 정적이 흘렀다. 관중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이 충격적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형 홀로그램 화면은 진의 코어가 과부하되는 모습을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시한폭탄이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린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겹게 마지막 영자 에너지를 끌어모았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아주 작은, 하지만 응축된 푸른빛 구슬이 생성되었다. 그것은 흡사 별 하나의 잔해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걸겠다는 비장함이 떠올랐다.
그 순간, 링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불투명한 에너지 필드가 갑자기 강도를 최대로 끌어올리며 더욱 강력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동시에 링 바닥에서 비상 탈출용 격벽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대회 주최 측에서 강철룡의 자폭을 감지하고 개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격벽이 완전히 솟아오르기 전에, 진의 코어가 한계에 다다랐다.
콰아아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링 중앙에서 거대한 에너지 폭발이 터져 나왔다. 붉은 섬광이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았고, 에어 커튼과 비상 보호막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링 전체가 엄청난 충격파에 휘감기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이대로 린이 무사할 수 있을까? 대회는? 천하의 운명을 건 이 대결은, 이대로 파국을 맞이하는 것인가?
연기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잿빛 연기 속에서, 하나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서 있었다. 겨우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잔상이었다.
과연 누가 살아남은 것인가?
이어진 정적은 모든 관중들의 숨통을 조였다. 이 대결의 승자는, 그리고 생존자는 과연 누구일까. 이 대회의 운명은, 그리고 천하의 운명은, 지금 이 순간 결정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