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폐허 속, 나는 낡은 철검을 움켜쥔 채 발소리마저 죽이며 나아갔다. 수십 년 전, 천지의 대변동 이후 영광을 잃고 잊혀진 청운문의 약원(藥園) 터였다. 한때 희귀한 영초(靈草)들이 풍성하게 자라던 곳은 이제 뒤틀린 괴식물들의 늪지대가 되어 있었다. 공기는 썩은 흙냄새와 역겨운 단내, 그리고 알 수 없는 독기의 혼합물로 가득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풀 한 포기, 흙 한 줌조차도 평범하지 않은 이 땅은 살아남기 위해선 단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부서진 돌멩이와 꺾인 나무뿌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내 심장을 죄는 불협화음 같았다. 이 거대한 죽음의 숲에서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단 하나, 절망적인 삶을 연명시켜 줄 한 줄기 희망이었다.

“젠장… 이래선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들겠군.”

내 영력(靈力)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며칠 밤낮을 영석(靈石) 한 조각 없이 움직인 탓에, 온몸의 기혈(氣血)이 메마른 가지처럼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몸으로 약원에 깊숙이 들어오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며칠 전, 썩은 독수(毒水)에 상처 입은 동료, 소윤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녀를 살릴 영약(靈藥)은 오직 이곳, 폐허가 된 약원 깊숙한 곳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변이된 괴식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녹슨 검 끝으로 넝쿨을 헤치자, 진득한 액체가 묻어 나왔다. 섬뜩한 핏빛이었다. 이곳의 식물들은 더 이상 햇빛과 물을 통해 양분을 얻지 않았다. 부패한 영기(靈氣)와, 가끔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불운한 영수(靈獸)들의 피를 흡수하며 자라났다.

그때였다. 내 시야 저 너머, 뒤틀린 나무뿌리가 얽힌 틈새에서 섬광처럼 붉게 빛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저것은… 분명 ‘혈선삼(血線蔘)’이었다! 희귀하기로는 최고로 꼽히는 영약 중 하나. 부패한 영기에 오염되지 않고 저리도 선명한 핏빛을 띠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 효능이 온전히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소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절망과 함께 찾아오는 법. 혈선삼 주변에는 거대한 덩굴들이 마치 살아있는 팔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뿌리줄기 하나하나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무엇보다 섬뜩했던 것은, 그 덩굴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수많은 동물의 뼈들이었다. 짐승의 것인 줄 알았던 핏빛 액체가 내 발에 묻었던 것은, 바로 이 덩굴에 걸려 희생된 영수들의 피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덩굴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약원의 독기와 부패한 영기를 흡수하며 수십 년간 변이된 괴물, ‘혈독화(血毒花)’였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식충식물 같았다. 중앙에는 붉은색 꽃봉오리가 기분 나쁘게 펄럭이며 독특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향기는 마비성 독을 품고 있어, 멀리서 맡아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하아… 하필이면 이런 곳에…”

혈독화는 숙주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다는 전설 속 식물이었다. 이 거대한 괴물은 아마 청운문이 멸망하던 날, 모든 영약과 영수들의 피를 흡수하며 탄생한 것일 터였다. 나는 검을 고쳐 쥐었다. 무모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소윤을 살려야 했다.

나는 폐부를 쥐어짜듯 마지막 남은 영력을 끌어모았다. 전신에 미약하게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비영보(飛影步)’. 내가 익힌 보법 중 가장 빠르지만, 영력 소모가 극심한 기술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혈독화의 덩굴들 사이로 돌진했다.

쉬이이익!

내가 움직이자마자, 혈독화의 거대한 덩굴들이 뱀처럼 솟아올랐다. 마치 나의 움직임을 예측이라도 한 듯, 빈틈없이 사방에서 조여들어 왔다. 덩굴 끝에 달린 날카로운 가시들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가시들을 피하며 혈선삼이 있는 중앙을 향해 몸을 던졌다.

영력의 흐름이 불안정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발소리가 거칠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덩굴 하나가 내 왼쪽 어깨를 스쳤다. 날카로운 가시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 욱신거리는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더욱 속도를 냈다.

타겟은 혈독화의 가장 거대한 꽃봉오리. 그곳이 바로 이 괴물의 핵이자 가장 약한 부위라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크아아악!”

검에 모든 남은 영력을 집중했다. 검날이 푸른빛으로 섬광처럼 빛났다. 혈독화의 덩굴들이 나를 덮치기 직전,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검을 휘둘렀다. ‘천뢰검결(天雷劍訣)’의 첫 번째 초식, ‘뇌광참(雷光斬)’. 비록 제대로 된 영력 없이 휘두른 허접한 흉내에 불과했지만, 나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콰앙!

검 끝이 꽃봉오리에 닿자마자, 응축된 영력이 폭발했다. 붉은 꽃잎이 산산조각 났다. 진득한 핏빛 액체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혈독화는 거대한 몸뚱이를 떨며 서서히 축 늘어졌다. 덩굴들의 움직임이 멈추고, 독한 향기도 옅어졌다.

털썩.

모든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검을 쥔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떨리고 있었다. 왼쪽 어깨의 상처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혈선삼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기어가는 듯 움직여 혈선삼 앞으로 다가갔다. 뽑아낸 혈선삼은 생각보다 작고 붉은 기운이 약했다. 변이된 약원 속에서 버티느라 상당 부분 영기를 잃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소윤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살았다. 소윤이…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약원 전체를 울리는 둔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혈독화와의 격전이 다른 것을 불러들인 것이 분명했다. 피와 독기, 영력의 잔해. 이 모든 것이 거대한 포식자를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었을 터였다.

나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약원의 입구 쪽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 폐허가 된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 중 하나, ‘만독귀수(萬毒鬼獸)’였다. 온몸이 독기에 절어 검붉은 비늘로 뒤덮인, 이빨 하나하나에 맹독이 흐르는 거대한 괴물.

만독귀수는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그 거대한 덩치가 좁은 약원 입구를 가득 메웠다. 놈은 쩍 벌어진 입에서 녹색 독액을 뚝뚝 흘리며 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남은 영력은 단 한 줌도 없었고, 몸은 만신창이였다. 눈앞의 만독귀수는 내가 죽음을 맞이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절망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소윤을 살릴 희망은 손에 쥐었지만, 그것을 전해줄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인가.

만독귀수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몸짓에 약원의 썩은 넝쿨들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는 간신히 핏빛 약초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절대로.

폐허의 밤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밤에 맞서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