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실의 붉은 등 아래, 지혜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현상액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녀의 모든 신경은 눈앞의 트레이에 집중되어 있었다. 방금 전 현상액에 담긴 필름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던 이미지.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마지막 정착액 단계, 흐릿했던 형태가 선명한 윤곽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지혜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시작되었다.
사진 속에는 서연이 있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분명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는 작은 아이가 안겨 있었다. 두툼한 털실 담요에 싸인 아기는 통통한 볼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눈동자, 콧날,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나도 익숙했다. 지혜의 할아버지, 사진관의 주인이었던 그 사람의 젊은 시절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지혜는 사진 뒷면을 확인했다. 필름에 새겨진 날짜는 1978년. 서연이 1972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978년의 사진이라니? 게다가 할아버지는 서연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아이에 대한 언급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지혜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차가운 공포가 심장을 옥죄어 왔다. 할아버지는 무엇을 숨겼던 걸까? 서연은 정말 살아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이 아이는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지혜는 사진을 든 채 암실을 뛰쳐나왔다. 밤늦은 시간, 사진관은 고요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심장 박동 소리만이 거세게 울렸다. 당장 누군가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사진관 문을 잠그고 낡은 골목을 가로질러 나섰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가 향한 곳은 사진관 맞은편, 최씨 할머니가 운영하는 낡은 다방이었다. 할머니는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몇 안 되는 이웃이었다.
“할머니, 계세요?”
지혜의 목소리는 떨렸다. 문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쌍화차 향과 함께 최씨 할머니의 인자한 얼굴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놀란 듯 지혜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얼굴이 새파랗네.”
지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에 든 사진을 내밀었다. 최씨 할머니는 돋보기를 고쳐 쓰고 사진을 받아들었다. 빛바랜 사진 속 인물들을 한참 들여다보던 할머니의 얼굴에 천천히 경악이 번졌다. 할머니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서연이… 서연이가 살아 있었어… 게다가 이 아이는…”
할머니는 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는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그 아이… 그 아이가 살아있었어? 나는… 나는 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지혜는 할머니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할머니, 이 사진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세요? 할아버지는 왜 아무 말씀도 안 해주셨을까요?”
최씨 할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했지. 서연이가 사라진 후 몇 년 뒤였을 거야. 모두가 서연이가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가끔 그녀를 봤어. 강가 느티나무 아래서,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을 말이야. 늘 보퉁이를 싸 들고 왔었는데… 아마 그 안에 이 아이가 있었던 게 분명해.”
할머니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잠겼다. “말도 붙이지 못했어. 워낙 조심스러워 보였거든. 누가 쫓는 사람처럼 늘 주위를 살피고,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지. 한 번은… 한 번은 멀리서 한 남자가 서연이를 훔쳐보는 것을 봤어. 다리를 절룩이는 남자였는데… 왠지 섬뜩해서 나도 모르게 몸을 숨겼지. 그때부터는 서연이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어.”
다리를 절룩이는 남자. 지혜의 머릿속에 전에 할머니가 해주었던 또 다른 이야기 조각이 떠올랐다. 할아버지의 오래된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인물. 사진 속 서연과 아이, 그리고 할머니의 기억이 엉켜 복잡한 실타래를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서연과 이 아이를 감추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서연 스스로가 어떤 위험 때문에 숨어 살았던 걸까? 다리를 저는 남자는 누구이며, 서연의 비밀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지혜는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이가 안겨 있는 털실 담요. 어렴풋이 보이는 무늬가 있었다. 꽃잎 같기도 하고, 작은 별 같기도 한 기하학적인 문양.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었다. 할아버지의 물건들 중에서… 그녀는 퍼뜩 기억을 떠올렸다. 할아버지의 서재, 늘 잠겨 있던 낡은 서랍장 깊은 곳에 놓여 있던 작은 나무 상자. 그 상자 뚜껑에 똑같은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최씨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다시 사진관으로 돌아온 지혜는 다급하게 서재로 향했다. 낡은 서랍장, 맨 아래칸의 잠긴 서랍. 할아버지가 생전에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했던 그 서랍이었다.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숨겨두었던 서랍 열쇠를 꺼내 조심스럽게 자물쇠에 넣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서랍이 열렸다. 안에는 먼지 쌓인 낡은 가죽 일기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 뚜껑의 문양과 똑같은 문양이 일기장 표지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지혜는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할아버지의 익숙한 필체가 굵고 흐트러진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절박함과 죄책감이 서려 있는 듯했다. 지혜의 눈에 첫 문장이 들어왔다.
“나의 서연, 나의 죄… 이 모든 것이 나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