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잿빛 하늘 아래, 들꽃은 꺾이지 않는다
바람골 마을의 아침은 언제나 회색빛이었다. 동쪽 산등성이를 겨우 넘겨 돋아나는 해는 빛 한 줌 제대로 뿌리지 못하고, 잿빛 하늘 아래 온 마을을 칙칙한 그림자로 드리웠다. 지환은 비좁은 초가집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퀴퀴한 흙냄새와 전날 태운 나무의 잔향이 섞여 코끝을 찔렀지만, 이제는 익숙한 냄새였다.
“콜록, 콜록… 지환아, 다 됐냐?”
안방에서 할머니의 마른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지환은 불을 지피던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금방 돼요, 할머니. 어제 남은 죽 데우고 있어요.”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났지만, 애써 활기차게 대답했다. 작년 가을, 고약한 역병으로 부모님을 잃은 후, 열여덟 살의 지환은 이 집의 유일한 가장이었다. 열 살배기 여동생 다온이와 병약한 할머니를 보살피는 것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묽은 죽 한 그릇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서자, 할머니는 이불을 목까지 덮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마른 몸은 이불 속에서도 그 윤곽이 뚜렷했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할머니?”
“괜찮다. 그저 날이 궂어서 그래. 어서 너도 먹어라.”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죽 그릇을 가리켰지만, 지환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죽 한 그릇을 세 식구가 나눠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할머니도, 지환도 알고 있었다. 어젯밤, 다온이가 잠결에 배를 웅크리며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지환은 오늘 아침 제 몫을 더는 탐낼 수 없었다.
“전 일찍 나가서 일해야 하니, 이거 드시고 좀 더 주무세요.”
지환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닳고 닳은 가죽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품삯으로 받을 곡식으로는 간신히 풀칠이나 할 정도였다. 대흥 제국의 하늘 아래, 바람골 마을의 백성들은 매일이 곡예였다. 조금만 방심해도 벼랑 끝으로 떨어질 듯한 위태로운 삶.
집을 나서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볼을 때렸다. 굽이진 오솔길을 따라 마을 어귀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저 멀리 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이게 다 무엇들인가!”
굵고 거만한 목소리가 마을 어귀를 쩌렁쩌렁 울렸다. 비좁은 길목을 막아선 것은 징세관 나부랭이와 그 뒤를 따르는 제국 병사들이었다. 징세관은 비단 옷을 휘날리며 살찐 몸을 뽐내고 있었고, 병사들의 창 끝은 차갑게 빛났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허름한 차림으로 쭈뼛거리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얼굴에는 공포와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풍년이라 그리 외쳐대더니, 내 눈에는 죄다 빈 창고만 보이는구려!” 징세관은 코웃음을 쳤다. “폐하께서 새로이 건립하실 용상궁에 들어갈 진귀한 나무와 보석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너희 같은 미천한 것들이 감히 상상도 못 할 천하제일의 궁이다!”
새로운 궁궐 건설. 또 그 이야기였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황제의 새 궁궐 공사는 끊임없이 마을 사람들의 피를 말렸다. 걷잡을 수 없이 오르는 세금, 끝없이 이어지는 부역 동원, 그리고 이제는 없는 살림을 털어내라는 협박까지.
“나으리, 저희는 정말 더 드릴 게 없습니다요! 올해는 가뭄까지 심해서…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도 못했습니다요!”
마을에서 가장 연로한 돌쇠 할배가 앞으로 나서며 굽신거렸다. 허리가 반쯤 꺾인 노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헛소리!” 징세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뭄 핑계는 지겹다! 내 오늘 너희 마을에서 어미 소를 열 마리, 돼지를 스무 마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진상미 백 섬을 가져가라는 명을 받았다. 어서 내어놓아라!”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미 소 열 마리, 돼지 스무 마리, 진상미 백 섬이라니. 그것은 이 작은 마을의 모든 재산을 긁어모아도 모자랄 양이었다. 당장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으리! 그건… 그건 너무하십니다요! 저희는 그걸 내어놓으면… 다 죽으라는 말씀이십니까요!”
마을 아낙 하나가 울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 뒤로 다른 이들도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뜨렸다.
“죽어? 죽으면 그만이지!” 징세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희가 한 마리 죽으면 백 마리 짐승이 그 자리를 메울 것이고, 너희가 굶어 죽으면 다른 촌락의 백성들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대흥 제국의 백성은 발에 채이는 것이니 걱정 마라!”
그는 고갯짓으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마을 안으로 들이닥쳤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억지로 끌려 나오는 살림살이, 텅 빈 창고를 뒤지는 손길, 그리고 마침내 울부짖는 소들의 비명까지.
지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어미 소를 끌고 가는 병사의 등 뒤로, 송아지가 연신 어미를 부르며 따라가려 했지만, 매정하게 휘두른 창자루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송아지는 풀밭에 고꾸라진 채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마치 다온이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정말 미쳐 돌아가…”
돌쇠 할배는 주저앉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어르신… 이렇게 계속 당해야만 하는 겁니까…?”
지환은 할배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할배는 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지환이 처음 보는, 깊은 슬픔과 함께 어떤 결의가 담겨 있었다.
“당해야만 하는가… 글쎄다. 하지만 꺾여서는 안 되지. 이 잿빛 하늘 아래, 들꽃은 꺾이지 않는 법이니…”
할배의 말은 마치 수수께끼 같았지만, 지환의 가슴에 작은 불씨를 던졌다. 꺾이지 않는 들꽃. 그것은 바로 그들, 평범하지만 강인한 백성들을 말하는 것일까.
징세관은 마을 어귀에 쌓인 물건들을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는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어미 소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음, 이 정도면 되었다! 다음 달까지 진상미 백 섬을 준비해 두어라! 그때도 이 모양이면… 이 마을은 잿더미가 될 줄 알아라!”
징세관은 섬뜩한 경고를 남기며 병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그들이 떠난 길목에는 먼지만이 자욱하게 일었고, 그 뒤에는 절망에 잠긴 마을 사람들이 멍하니 서 있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아낙들의 통곡, 늙은이들의 한숨.
지환은 말없이 송아지에게 다가갔다. 어미를 잃은 송아지는 아직도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송아지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주었다. 차가운 바람이 지환의 뺨을 스쳤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
지환의 눈빛이 흔들렸다. 부모님을 잃고, 다온이와 할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은 그를 짓눌렀지만, 동시에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주저앉는다면, 결국 다온이도 할머니도 저 징세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날 밤, 지환은 잠 못 이루고 뒷산 언덕에 올랐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저 멀리, 제국의 수도 ‘황성’의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그곳은 온갖 화려함과 탐욕으로 가득 찬 곳일 터.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늦게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냐, 지환아.”
돌쇠 할배였다. 할배는 지환의 옆에 조용히 앉아 같은 곳을 응시했다.
“할배… 정말 방법이 없는 겁니까? 저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거예요?”
지환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할배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모두 들꽃과 같다 했지. 허나, 들꽃도 무리 지어 피어나면… 들판을 뒤덮을 수 있는 법이다.”
지환은 할배의 얼굴을 돌아봤다. 할배는 눈을 감고 있었다.
“들꽃은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뿌리까지 뽑히지는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꺾인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법이지.”
할배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나무 조각을 꺼냈다. 그 위에는 희미하게 세 개의 점이 찍혀 있었다.
“이게… 뭡니까?”
지환이 물었다.
할배는 나무 조각을 지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차갑고 거친 나무의 감촉이 느껴졌다.
“밤이 가장 깊을 때, 새벽이 찾아오는 법이다. 너무 절망하지 마라. 너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짧았지만, 지환의 심장을 울렸다. 흩어진 들꽃들이,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잿빛 하늘 아래, 그 작은 불씨는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환은 고개를 들어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는… 이 하늘도 우리들의 것이 될 것이다. 반드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