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핏빛 서곡
고급스러운 샹들리에가 뿜어내는 황금빛 아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와인 잔 부딪히는 소리와 섞여 웅웅거렸다. 샴페인 거품처럼 가볍게 떠다니는 축하의 말들, 위선을 가장한 찬사들이 오가는 공간. 지우는 그 모든 번잡함 속에서 마치 유령처럼 서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녀 역시 아무에게도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완벽하게 조율된 가면무도회의 중심에 선 한 남자를 주시할 뿐이었다.
민준.
그는 여전히 빛났다. 아니,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빛났다. 성공의 광채가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빛에 이끌려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검은색 수트에 빈틈없이 잘 다려진 셔츠, 세련된 넥타이. 모든 것이 그의 지금 위치를 말해주는 듯했다. 갤러리 중앙에 걸린 대형 추상화 앞, 민준은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유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한한 신뢰를 약속하며 속삭이던 그 미소 그대로였다.
지우는 손에 든 잔에 담긴 차가운 탄산수를 느리게 홀짝였다. 혀끝에 닿는 상큼함은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도 텁텁한 쓴맛으로 변질되는 것 같았다. 저 미소 아래 숨겨진 잔혹함,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 할 배신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는지, 이 자리에 모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터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민준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잠시 그녀가 서 있는 쪽으로 향하는 듯했다.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들킬 리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그 지우가 아니었다. 핏기 없이 바싹 마른 얼굴, 움푹 들어간 눈, 한때 윤기 나던 머리카락은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몇 년 만에 마주하는 그의 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녀 스스로도 거울 속 자신을 볼 때마다 낯선 타인을 마주하는 기분이었으니까.
“강민준 씨의 통찰력과 추진력 덕분입니다. 정말이지, 이 프로젝트가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옆에 서 있던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프로젝트. 그래, 그 프로젝트. 지우의 손이 저도 모르게 꽉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둔탁한 감각만이 저릿하게 퍼져나갈 뿐이었다.
그 프로젝트는 원래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아이디어, 그녀의 땀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꿈이었다. 민준은 그 꿈의 조력자였다. 빛나는 눈으로 함께 밤을 새우며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하고, 미래를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뜨거운 격려와 지지 덕분에 그녀는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아주 비참하고 처절한 방식으로였다.
그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이룬 성과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 아이디어가 얼마나 빛나는가였고, 저는 그 빛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을 뿐입니다.”
오만하고, 뻔뻔한 위선. 지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그녀의 뇌리에는 그 시절의 따뜻한 추억 대신, 비수로 날아와 박히는 조롱 섞인 민준의 말이 맴돌았다.
*‘네 그림, 네 아이디어? 지우야,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결국 중요한 건 누가 그걸 현실로 만들었냐는 거지. 그리고 그건 나야.’*
*‘너는 그저, 내 성공을 위한 발판이었을 뿐이야.’*
그 말들은 그녀의 심장에 깊이 박혀 시들지 않는 가시나무처럼 자라났다. 가시들은 매일같이 살을 파고들었고, 그녀는 그 고통 속에서 겨우 숨을 쉬었다. 삶의 모든 의미가 사라진 나락 속에서 그녀를 지탱한 유일한 감정은 복수심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민준의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민준을 향해 아첨과 존경을 표했다. 민준은 그들의 시선을 즐기며,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완벽한 가면이었다. 이면에 감춰진 그의 추악한 욕망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적어도 그녀를 제외하고는.
지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 더 이상 상처받은 짐승의 눈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굶주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이었다. 그녀의 삶이 파괴된 대가로 얻은 것은, 이제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증오와 차가운 이성이었다.
그녀는 민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성급함은 언제나 독이 되는 법.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의 복수는 그저 분노의 발산이 아니었다. 민준이 겪었던 모든 영광을 하나씩 박탈하고, 그가 쌓아 올린 성공의 탑을 가장 밑바닥부터 무너뜨리는, 예술적인 파괴가 될 것이었다.
민준은 누군가와 즐겁게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의 잔에 담긴 붉은 와인이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마치 핏빛 서곡처럼.
지우는 천천히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은 그림자처럼 희미해졌지만, 그 발걸음에는 이전에 없던 단단한 결의가 실려 있었다.
민준. 네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너는 모든 것을 잃기 시작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
어둠 속에서, 차갑고 잔혹한 미소가 지우의 입술에 번져나갔다. 복수의 그림자는 이제 막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