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이슬**
재희는 폐허의 그림자를 벗 삼아 걸었다. 하늘은 희뿌연 잿빛으로 덧칠되어 있었고, 발끝에 차이는 자갈과 모래마저 과거의 찬란했던 문명을 먹고 자란 찌꺼기 같았다. 툭하면 불어오는 바람은 부식된 쇠붙이 냄새와 알 수 없는 미세먼지를 실어 날랐고, 목구멍은 언제나 칼칼하게 말라 있었다. 마스크 아래로 거친 숨을 내쉬며, 재희는 무심하게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모든 것이 망가지고 닳아버린 세상.
벌써 이틀째, 제대로 된 식량을 입에 대지 못했다. 등에 짊어진 낡은 배낭은 텅 비어가고 있었고, 찌그러진 물통 속엔 마지막 남은 두 모금의 물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녹색 지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다면, 아마 진작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저,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재희를 밀어붙였다.
“젠장….”
나지막이 욕설을 읊조리며 재희는 낡은 건물 잔해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한때는 거대한 쇼핑몰이었을 곳. 이제는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철골 구조물이 을씨년스러운 비명처럼 바람에 울었다. 바닥에 흩어진 깨진 유리 조각들은 지난날의 화려함을 희미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재희는 조심스럽게 돌무더기를 헤치며 나아갔다. 이런 곳은 숨어있는 위험만큼이나 귀한 것을 발견할 확률도 높았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쳐 간신히 중심부쯤 도달했을 때, 재희의 눈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전기가 끊긴 지 수십 년이 지난 이 폐허에서 빛이라니.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꿈속의 일렁이는 환상 같았다. 혹시나 하는 희망과 동시에,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경고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재희는 허리춤에 찬 개조된 석궁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누구… 없습니까?”
갈라진 목소리가 공간을 맴돌다 사라졌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만, 빛은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 빛은 복도 끝, 무너져 내린 천장 아래의 작은 틈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재희는 발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어쩌면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가느다란 줄기처럼 피어났다.
틈새 너머로 몸을 기울여 안을 들여다본 순간, 재희는 숨을 헙 들이켰다. 작은 공간 안, 낡은 전선과 파이프들이 복잡하게 얽힌 곳에서 오래된 비상 발전기 하나가 윙윙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놀랍게도 반쯤 넘어진 자판기가 서 있었다. 액정은 망가져 있었지만, 한쪽 귀퉁이에서 푸른색 조명이 깜빡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판기 아래로 흥건히 고여 있는 물웅덩이였다.
“이게… 뭐야….”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폐허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기계라니. 재희는 웅덩이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분명 정체불명의 오염물질이 섞여 있을 테지만, 일단 목을 축여야 했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물을 떠서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입술을 적셨다. 비릿하고 텁텁한 맛. 하지만 오랜 갈증을 해소해 줄 만큼은 되었다.
그때였다.
“크르릉….”
등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재희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 두 개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짐승이 아니었다. 폐기된 기계 부품과 짐승의 살점이 기괴하게 섞여 만들어진, 이른바 ‘철견’이었다. 거친 쇳덩어리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녹슨 강철 뼈대가 드러난 몸체는 그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분명 폐허 깊숙한 곳을 배회하는 사냥꾼일 터였다.
두 마리.
재희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한 마리는 덩치가 크고 움직임이 둔해 보였지만, 다른 한 마리는 작고 날렵했다. 재희의 손에 든 석궁의 장전 시간은 짧지 않았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가까이 오지 마!”
재희는 으르렁거렸다. 철견들은 재희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작은 녀석이 먼저 움직였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재희는 재빨리 몸을 굴려 공격을 피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희미한 통증이 남았다.
“젠장, 젠장!”
재희는 일어서면서 석궁의 시위를 당겼다. 시위가 팽팽해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울렸다. 동시에 뒤따라 달려든 덩치 큰 철견이 재희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녹슨 턱이 재희의 어깨를 물기 직전, 재희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쉬이익!’
개조된 강철 화살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가 덩치 큰 철견의 눈을 정확히 꿰뚫었다. ‘끼이이잉!’ 기계음과 짐승의 비명이 뒤섞인 끔찍한 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녀석은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몸체에 박힌 전선들이 스파크를 튀기며 끊어졌다.
하지만 아직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 작은 철견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더욱 거친 울음소리를 내며 재희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화살을 재장전할 시간이 없었다. 재희는 널브러져 있던 굵은 철근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콰앙!’
돌진해오는 철견의 머리를 철근으로 내려쳤다. 그러나 녀석은 생각보다 강했다. 머리가 찌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끈질기게 몸을 움직였다. 재희는 다시 철근을 휘둘렀다. 필사적인 사투였다. 한 대, 또 한 대. 마침내 녀석은 축 늘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몸에 박힌 기계 부품이 산산조각 나면서 스파크를 튀기다 이내 고요해졌다.
숨을 헐떡이며 재희는 주저앉았다.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겨우 몸을 가다듬고 손에 든 철근을 바닥에 내던졌다. 다시 한번 웅덩이로 향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절박한 갈증이었다. 물을 마시고, 또 마셨다. 차갑고 비릿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살아있다는 실감이 온몸을 꿰뚫었다.
“살아남았다….”
재희는 폐허의 어둠 속에서 작게 속삭였다. 눈앞의 자판기에서는 여전히 푸른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고장 난 기계가 어떤 이유로 이 척박한 땅에서 생명의 물을 토해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재희는 다시 숨을 쉬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잿빛 하늘에서는 희미한 별 몇 개가 간신히 빛나고 있었다. 재희는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낡은 배낭을 고쳐 맸다. 아직 갈 길은 멀었고, 어떤 위협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재희는 알고 있었다. 이 폐허의 끝에 무엇이 있든, 단 한 가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의지. 재와 이슬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재희는 그렇게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