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새벽의 서곡
어둠이 짙게 깔린 거대한 강철 도시는 숨죽인 짐승처럼 침묵했다. 높은 건물들의 실루엣은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하늘을 찔렀고, 그 아래를 흐르는 인공 강물은 기계적인 숨결을 토해내며 흐릿하게 빛났다. 그 침묵을 깨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그림자였다. 높이 솟은 빌딩의 그림자와는 확연히 다른, 불길한 존재감이었다.
“로그인 완료. ‘아수라’ 시스템 온라인.”
낮게 깔리는 인공지능의 음성에도 류진의 심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핏발 선 독수리의 그것처럼 번뜩였고, 굳게 다문 입술은 일말의 망설임도 허락하지 않았다. 조종석의 차가운 금속이 그의 뺨에 닿았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의 팔다리처럼 움직이는 거대한 강철 육체, 아수라.
육중한 발걸음 소리조차 주변의 소음에 묻히는 깊은 밤. 류진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목표 지점인 ‘제7 연구 단지’로 향했다. 그곳은 정혁, 한때 그의 유일한 벗이자 동지였던 자가 새롭게 세운 제국의 심장부였다. 그리고 그 심장부에서, 류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배신자의 숨통을 조일 단서를 찾아낼 작정이었다.
“경고. 전방 300미터, 감시 드론 2기 감지. 식별 코드: ‘타이폰’.”
아수라의 머리 부분에 장착된 센서가 빠르게 정보를 분석했다. 류진은 피식 웃었다. 타이폰. 정혁이 언제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붙이던 이름이었다. 하찮은 잡병기에도 그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이다니. 역겨운 위선자 같으니.
“접근 허가. 통신 차단. 광학 미채 유지.” 류진은 간결하게 명령했다.
아수라는 마치 제 존재를 망각한 듯, 거대한 몸체를 숨긴 채 기동했다. 감시 드론들이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류진은 단지 기다렸다. 그 드론들이 감시 구역을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진입하는 순간을.
콰앙!
아수라의 오른팔에 장착된 고밀도 에너지 블레이드가 번개처럼 뻗어나갔다.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드론 하나가 두 동강 나며 폭발했다. 잔해가 지면에 떨어지기도 전에, 류진은 왼팔에 내장된 와이어 랜스를 발사해 나머지 드론의 동력원을 정확히 꿰뚫었다. 섬광이 터지고 드론은 그대로 고철 덩어리가 되어 추락했다.
“잡음 없음. 목표 지점까지 100미터.”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류진은 이 모든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정혁, 그 자는 언제나 자신을 ‘천재’라 칭했지만, 류진은 언제나 그림자 속에서 그를 보좌하며, 그의 ‘천재성’을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존재였다. 어쩌면 그가 아수라를 다루는 방식은 정혁조차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정밀함과 잔혹함을 담고 있었다.
**쿵, 쿵, 쿵.**
아수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연구 단지의 외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특수 합금으로 제작된 두꺼운 장벽은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낼 것처럼 위압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그러나 류진은 그 견고함 속에서 약점을 찾아냈다. 이곳은 정혁의 초기 설계가 반영된 곳. 정혁의 습관과 생각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메인 게이트 측면, 비상 전력 라인 감지. 출력 약화 지점 특정.”
정혁은 항상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 효율성 뒤에는 늘 위험 부담이 따랐다. 류진은 아수라의 손가락 끝에서 고밀도 레이저를 발사했다. 가느다란 붉은 빛줄기가 외벽의 특정 지점을 정확히 관통했다. 금속이 녹아내리는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비상 전력 라인 오작동. 메인 게이트 시스템 우회 경로 확인.”
류진은 능숙하게 아수라를 조작해 균열이 생긴 지점으로 파고들었다. 외벽이 찢어지는 굉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수라의 거대한 몸체가 안으로 진입했다.
“침입자! 코드 레드! 격리 프로토콜 가동!”
내부에서 무인 경비 로봇들이 튀어나왔다. 류진은 그들의 등급을 재빨리 스캔했다. ‘센티넬 Mk.II’. 정혁이 한때 자신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던 초기 모델이었다. 그가 직접 설계에 참여했던 기체들. 이제는 그 칼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하찮은 것들.”
아수라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공기를 가르며 로봇 하나를 산산조각 냈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이어지는 다른 로봇들의 공격. 레이저포와 미사일이 아수라의 장갑에 빗발쳤지만, 류진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공격 패턴을 읽어내며 여유롭게 반격했다.
“젠장, 아직도 이따위 구식 모델을 쓰고 있다니.” 류진은 냉소를 흘렸다. 정혁은 언제나 최첨단 기술을 쫓는 척했지만, 기본적인 방어 시스템은 늘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거는 류진의 손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 쾅! —**
아수라의 왼팔에 내장된 ‘분광(分光) 캐논’이 작렬했다. 녹색의 에너지파가 원형으로 확산되며 주변의 모든 센티넬들을 한순간에 고철 덩어리로 만들었다. 사방에서 터져 나가는 폭발음과 함께, 연구 단지의 내부 통로가 순식간에 아수라만의 전장으로 변했다.
그때, 류진의 뇌리를 스치는 파편적인 기억들이 있었다.
* * *
“류진, 봐라! 이게 우리가 만들 ‘세상을 바꿀 기체’의 설계도다!”
정혁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복잡한 회로도와 설계도가 들려 있었다. 류진은 그의 옆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것은 언제나 류진의 몫이었다.
“너무 과대한 포장 아닌가, 정혁? 아직 프로토타입도 완성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야! 너와 내가 함께라면 불가능은 없어! 이 ‘프로젝트 아담’은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열 거야! 모든 고통과 불평등을 없애고, 우리 둘이 꿈꾸던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다. 류진은 그 순수한 열정에 전염되어 함께 밤샘 작업을 이어갔다. 그들은 완벽한 파트너였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증폭시켰다. 정혁은 꿈을 꾸고, 류진은 그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최초의 자율 지능형 메카닉’, 아담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정혁, 어째서…?”
화염과 파괴 속에서 류진은 겨우 살아남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칼날 같은 고통. 그리고 눈앞에 선 정혁의 차가운 미소.
“미안하다, 류진. 이 세상은 둘이서 이끌어 갈 만큼 넓지 않아. 그리고… 네 재능은 너무나도 뛰어나서, 내 그림자를 가려버리는군.”
그의 손에는 아담의 제어 코어가 들려 있었다. 그들이 함께 피땀 흘려 만들었던, 세상의 질서를 바꿀 힘을 가진 코어. 정혁은 그것을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류진은 절규했다. 배신감과 고통이 온몸을 찢는 것 같았다. 그의 꿈, 그의 이상, 그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버려졌고, 모든 것을 잃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 *
“닥쳐라.”
류진은 으르렁거렸다. 내면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분노가 그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그때의 고통, 그때의 절망, 그리고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던 정혁의 싸늘한 시선. 모든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타겟 탐색. 정혁의 개인 연구실. 최단 경로 탐색.”
아수라의 인공지능이 즉시 경로를 제시했다. 거대한 금속 문들을 부수고, 경비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며 류진은 전진했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정혁이 숨기고 있는 ‘핵심 정보’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이용해 정혁의 모든 것을 파멸시킬 계획이었다.
마침내, 거대한 데이터 서버 룸에 도착했다. 수많은 서버 랙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공간이었다. 이곳이 바로 정혁의 모든 비밀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시스템 침투 시작. 모든 데이터 백업 준비.”
아수라의 왼손에서 데이터 케이블이 튀어나와 메인 서버에 연결되었다. 류진은 고도로 암호화된 정혁의 시스템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때 설계했던 시스템이었기에, 류진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핵심 부분에 접근할 수 있었다.
**삐빅!**
“경고! 외부 해킹 시도 감지! 방화벽 가동!”
내부 경보 시스템이 요란하게 울렸다. 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혁은 예상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방어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류진의 손바닥 안이었다.
“2단계 암호화 해제. 제어권 확보. 방화벽 무력화.”
류진의 명령에 아수라의 시스템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서버 룸의 불빛들이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거대한 데이터의 흐름이 아수라의 코어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데이터 동기화 30%… 50%… 80%… 완료.”
마침내, 정혁의 모든 비밀이 류진의 손에 들어왔다. 그 속에는 프로젝트 아담의 진실, 정혁이 저지른 수많은 불법 행위, 그리고 그가 숨기고 있던 거대한 야망의 설계도가 담겨 있었다.
류진은 서버 룸의 중앙에 아수라를 세웠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아수라의 팔을 움직여 바닥에 선명한 글자를 새겨 넣었다.
**’D-DAY : 7’**
일주일. 일주일 뒤, 정혁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류진은 조용히 속삭였다.
“기다려라, 정혁. 네가 나에게 남긴 고통의 빚. 내가 직접 찾아가 갚아주마.”
아수라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복수의 서곡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