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노을이 지평선을 불태우는, 한때 고층 빌딩이 빽빽했던 도시는 이제 뼈대만 남은 거대한 무덤과 같았다.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앙상한 이빨처럼 솟아 있었고, 바람은 녹슨 철근 사이를 휘저으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토해냈다. 그 거대한 침묵 속에서, 낡은 방진 마스크를 쓴 소녀의 발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리고 있었다.
“언니,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 벌써 세 번째 건물이야.”
뒤따르던 작은 그림자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아였다. 흙먼지로 얼룩진 낡은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앳된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유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내일 아침은 굶어야 했다. 이미 며칠째 양을 줄이고 또 줄여 겨우 버티고 있었다.
“지하 통로가 있을 거야. 이런 대형 상가는 보통 비상 창고나 식품 저장고가 따로 있어.”
유나는 낡은 탐사용 랜턴을 들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갔다. 빛을 잃은 거대한 간판, 깨진 유리창 너머로 드러난 폐허의 풍경. 한때는 화려했을 진열장이 텅 빈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이곳이 한때 활기 넘치던 쇼핑몰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수아는 유나의 뒤를 바싹 쫓았다. 낡은 운동화가 부서진 파편 위를 걸을 때마다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묘하게도 주변의 정적을 더욱 강조하는 것 같았다. 어딘가에서 찢어지는 듯한 금속 소리가 들려왔다. 유나는 즉시 걸음을 멈추고 수아를 뒤로 끌었다.
“쉿. 무슨 소리야?”
수아는 겁에 질린 눈으로 유나를 올려다보았다. “몰라…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불규칙적이고, 무언가가 부딪히거나 긁히는 듯한 소리. 유나는 가방에서 닳고 닳은 휴대용 센서를 꺼내들었다. 붉은 빛이 깜빡였다.
‘오염체.’
유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런 폐허 지역에서 오염체와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언제나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특히 수아가 함께 있을 때는 더욱.
“수아, 내 뒤로 숨어. 절대 움직이지 마.”
유나는 속삭이듯 말하며 랜턴의 불빛을 최대한 줄였다. 오염체들은 빛과 소리에 민감했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벽에 바싹 붙어 몸을 숨겼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녹슨 철근 더미 사이에서, 끔찍하게 뒤틀린 형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무엇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살점과 금속 파편이 뒤섞인 기형적인 괴물이었다. 여섯 개의 다리가 불규칙하게 움직이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숨을 멈췄다. 괴물은 후각이 없는지, 아니면 아직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느릿느릿 주변을 탐색하며 지나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이대로 지나가 주기만을 바랐다.
바로 그때, 수아가 든 인형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쨍그랑!**
조용한 폐허에 인형의 금속 장식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괴물의 움직임이 멈췄다. 천천히, 마치 뒤늦게 먹잇감의 존재를 깨달은 듯, 끔찍한 머리가 이쪽을 향해 돌아왔다. 일곱 개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안 돼…!”
유나는 본능적으로 수아를 밀쳤다. “수아! 도망쳐!”
하지만 수아는 겁에 질려 발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괴물은 이미 그녀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뼈와 살이 뒤섞인 거대한 다리들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오는 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듯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유나는 결심했다.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에 걸린 펜던트를 쥐었다. 닳고 닳은, 한때는 눈부셨을 보석이 박힌 펜던트였다.
“변신!”
낮게 읊조린 주문과 함께, 펜던트에서 눈부신 백색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유나의 몸을 감싸자, 낡은 방진복은 깨끗한 흰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마법소녀의 전투복으로 변했다. 빛은 유나의 지친 얼굴을 감쌌고, 그녀의 눈은 푸른색으로 빛났다. 그러나 이 빛은 더 이상 예전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빛은 약하고, 불완전했다. 힘을 쓸 때마다 몸이 비명을 질렀다.
변신을 마치자마자, 유나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희미한 푸른색 보호막이 수아를 감쌌다. 괴물의 거대한 앞발이 보호막에 부딪히며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콰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보호막이 흔들렸다. 유나는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마력이 빨려 나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수아! 어서 피해! 나는 괜찮아!”
수아는 겁에 질린 채로 보호막 안에서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자, 수아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인형을 다시 쥐고 뒤편의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유나는 수아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괴물을 노려보았다. 여섯 개의 눈이 자신을 향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너만 남았네.”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손끝에서부터 희미한 빛의 구슬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남은 마지막 마력 조각을 쥐어짜내는 듯한 고통이 유나의 전신을 꿰뚫었다. 빛의 구슬은 점점 커졌지만, 예전처럼 거대하고 강력한 형태는 아니었다. 마치 굶주린 아이의 작은 주먹 같았다.
괴물은 유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을 감지한 듯, 더욱 거친 포효와 함께 달려들었다. 유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빛의… 심판!”
작지만 강렬한 빛의 구슬이 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빛은 괴물의 몸에 닿자마자 폭발했고, **파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렸다.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괴물은 한쪽 다리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녹색 피가 주변을 흥건하게 적셨다.
유나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변신이 풀리고 몸을 감쌌던 빛이 사라지자, 그녀는 다시 낡은 방진복 차림으로 돌아왔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느낌.
하지만 승리감은 잠시뿐이었다. 괴물은 죽지 않았다. 다리 하나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곱 개의 눈을 번뜩이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게다가, 더 큰 문제였다.
**끼이이익… 끼이이익…**
건물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끔찍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유나가 쓰러진 잔해 더미 위로 균열이 시작되었다. 전투의 충격으로 건물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지와 잔해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젠장…!”
유나는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피로와 마력 고갈로 몸이 제멋대로 떨렸다. 꼼짝없이 깔려 죽을 위기였다. 그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나 언니!”
수아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손에는 버려진 철근 조각이 들려 있었다. 작은 몸으로 괴물의 머리를 향해 철근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쾅! 쾅!** 하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수아의 공격은 미약했지만,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필사의 의지가 괴물을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 틈을 타 유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무너져 내리는 천장 잔해 사이로, 그녀는 수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아! 이쪽이야!”
수아는 괴물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후, 유나를 향해 달려왔다. 두 사람은 간신히 무너지는 건물의 입구를 벗어났다. **와르르…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 건물의 절반이 통째로 붕괴했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유나와 수아는 먼지와 돌멩이가 흩날리는 폐허 속에서 숨을 헐떡였다. 수아는 흙먼지로 뒤범벅된 인형을 꽉 끌어안은 채 훌쩍거렸다.
“언니… 언니 다쳤어…?”
유나는 팔을 들어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너만 무사하면 돼.”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번 전투로 너무 많은 힘을 소진했다.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버틸 수 있을까.
어둠이 짙게 깔린 폐허 도시의 지평선 너머로, 또 다른 불길한 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저것은… 또 다른 오염체 무리인가? 아니면…
유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늘밤은 살아남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과연 이 황폐한 세상에서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등 뒤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더욱 거대하고 어둡게 느껴졌다. 이 도시가 품고 있는 공포는,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유나는 알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녀의 역할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빛바랜 펜던트가 그녀의 목에 걸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생존을 위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