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먼지가 가득한 새벽이었다. 강하율은 움츠린 몸을 겨우 일으키며 낡은 천막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희뿌연 하늘은 이제 더 이상 태양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어슴푸레한 빛만이 지평선 너머에서 퍼져 나올 뿐, 세상은 여전히 영원한 황혼에 갇힌 듯했다.
차가운 바람이 해진 천막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맨살에 닿았다. 소름이 돋았다. 밤새 차가워진 체온을 되찾기 위해 하율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며칠째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 뱃속에서는 굶주림이 날카로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어제 겨우 찾아낸 딱딱한 뿌리 몇 조각이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흙냄새가 진동하는 쓴맛에 구역질을 참으며 삼켜야 했다.
하율은 품속에서 낡은 지도를 꺼냈다. 종이는 손때로 얼룩지고 가장자리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지도 위에는 붉은색 펜으로 표시된 여러 개의 X자 표식이 보였다. 한때 번성했을 도시들의 이름 위에는 어김없이 그 끔찍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그곳들은 그저 죽은 자들의 무덤이거나, 뒤틀린 짐승들의 영역일 뿐이었다.
시선은 지도 한구석에 있는 작은 마을의 이름 위에서 멈췄다. ‘새벽벌’. 이름만큼이나 희망적인 곳이기를 바라지만, 하율은 이미 수십 번이나 그런 기대를 품었다가 잔인하게 짓밟힌 경험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낡은 지도를 다시 품에 넣고 일어섰다. 이대로 주저앉아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저 또 다른 내일을 맞이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싸움이었다.
녹슨 단검을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하고, 낡은 가죽 배낭을 어깨에 둘러맸다. 배낭 안에는 물통과 얼마 남지 않은 건육 조각, 그리고 언제 주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낡은 성냥갑이 전부였다. 하율은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섰다.
황량한 들판이 펼쳐졌다. 한때는 푸른 생명으로 가득했을 땅은 이제 바싹 마른 흙먼지와 메마른 풀들로 뒤덮여 있었다. 드문드문 솟아 있는 검게 변한 나무들은 마치 죽은 자들의 손가락처럼 하늘을 향해 기괴하게 뻗어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땅을 병들게 한 알 수 없는 역병, ‘잿빛 저주’가 남긴 흔적이었다.
하율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최대한 노출되지 않도록 폐허가 된 건물들의 그림자나 듬성듬성 자란 가시덤불을 따라 이동했다. 죽은 듯 고요한 세상 속에서 그의 발걸음 소리만이 유일한 생명의 흔적처럼 들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희미하게 오래된 고가도로의 잔해가 보였다. 완전히 붕괴되지 않고 위태롭게 서 있는 그 구조물은 잿빛 저주가 세상을 덮치기 전의 문명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아래에는 분명 지나온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을 터였다. 하율은 고가도로 아래에서 한숨 돌릴 겸, 혹시 모를 물이나 식량을 찾아볼 요량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고가도로 아래는 어둡고 습했다. 무너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쌓여 있었고, 그 사이로 알 수 없는 형태의 이끼들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을 파고들었다. 하율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이런 곳이야말로 뒤틀린 짐승들이 숨어 있기 좋은 은신처였다.
오랜 시간 버려진 잔해들 속을 헤치고 다니던 중, 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무너진 차체의 파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아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금속 상자였다. 가슴이 뛰었다.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머릿속을 스쳤다. 구호품이거나, 아니면 오래된 통조림이라도…
조심스럽게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주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 소리만이 텅 빈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하율은 단검을 뽑아 들고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상자에 닿으려는 순간.
콰직!
갑작스러운 소음과 함께 그림자 속에서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짐승이었다. 그것은 개와 비슷한 형태였으나, 온몸은 검고 거친 털로 뒤덮여 있었고, 등뼈를 따라 솟아오른 뾰족한 돌기들은 썩은 이빨처럼 날카롭게 번들거렸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 눈이었다. 핏발 선 노란 눈동자는 광기로 번뜩이며 하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젠장!”
하율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던지며 피했다. 짐승의 앞발톱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찢고 지나갔다.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짐승은 멈추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굶주림에 미친 듯한 움직임이었다.
하율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낡았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짐승의 공격을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이런 짐승들과의 싸움은 언제나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작은 실수 하나가 곧 죽음으로 이어졌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다시 하율에게 달려들었다. 하율은 놈의 맹목적인 공격을 읽었다. 몸을 낮춰 달려드는 짐승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실어 단검을 짐승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꿰뚫리는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짐승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하율은 단검을 빼지 않고, 칼날을 짐승의 몸속에서 비틀었다. 놈의 몸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썩은 흙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짐승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눈의 광기도 서서히 사그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완전히 쓰러지기 전, 짐승은 마지막 발악으로 앞발을 휘둘렀다. 하율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어깨에 날카로운 발톱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결국 짐승은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축 늘어진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하율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칼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또다시 죽을 뻔했다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찢어진 어깨를 부여잡았다.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이 상처가 덧나면 큰일이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작은 상처는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율은 짐승이 죽어 나뒹구는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굶주림에 지쳐 공격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의 존재 자체가 놈에게 위협이었을까.
핏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찢어진 천 조각으로 급하게 상처를 대강 싸맸다. 어쩌면 이 짐승의 고기라도… 잠시 그런 끔찍한 생각이 스쳤지만, 이 짐승들은 잿빛 저주에 오염된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고기를 먹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율은 쓰러진 짐승을 뒤로하고 아까 발견했던 금속 상자로 향했다. 싸움으로 인해 상자는 차체 파편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그의 기대와는 달리 내용물은 허탈할 만큼 보잘것없었다.
낡은 군용 조끼 하나와, 녹슨 통조림 칼, 그리고 손바닥만 한 작은 가죽 주머니.
기대했던 식량은 없었다.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럼에도 하율은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혹시 모를 작은 희망이, 어쩌면 이 안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주머니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열어보니 안에는 오래된 금속 조각들이 가득했다. 동전 같은 것들이었지만, 더 이상 화폐로서의 가치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돈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하율은 왠지 모르게 그것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과거의 흔적이자, 한때 인간들이 살았던 세상의 조각들이었다.
주머니 밑바닥에서 그의 손가락에 무언가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닿았다. 꺼내보니 작은 금속 원반이었다. 표면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옅은 푸른색의 결정이 박혀 있었다. 결정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이것은 무엇일까. 하율은 조심스럽게 그 원반을 손에 쥐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묘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에 저 멀리, 고가도로의 잔해들 너머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 하나가 들어왔다.
낡고 거대했다. 잿빛 저주로 인해 대부분의 표면은 부식되고 허물어졌지만, 그 압도적인 규모는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대지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암석처럼 보였다. 수십 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의 문명이 남긴 유산이었다.
어쩌면 그곳에.
어쩌면 저곳에.
이 금속 원반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직감이 들었다.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이끌림이었다.
하율은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의 상처는 계속해서 고통을 토해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저 거대한 구조물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또 다른 짐승, 굶주림, 혹은 더욱 끔찍한 절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아가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고통과 황폐함의 끝에서, 아주 작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를 품고서.
하율은 검게 물든 하늘 아래, 고독하게 거대한 폐허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잿빛 먼지가 흩날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