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도시, 새벽 5시 37분.**
진우는 금속 파편이 박힌 장갑으로 허물어진 벽을 짚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녹슨 철의 감촉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했다. 한때 높이 솟아올라 자랑스럽게 빛을 발했을 건물들은 이제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거대한 무덤처럼 서 있었다.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두텁게 덮여 있었고, 간간이 부는 바람은 썩은 콘크리트 가루와 함께 폐허의 냄새를 실어 날랐다.
그의 방진 마스크 안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오늘로 열여덟 번째 도시다. 희망 없는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어깨에 멘 낡은 배낭은 얼마 안 되는 식량과 최소한의 생존 도구로 묵직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금속 막대의 감촉은 유일한 위안이자 무기였다. 이 막대 하나로 수십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젠장.”
진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갈증이 목을 태웠다. 어제 간신히 찾은 빗물 웅덩이는 바닥이 드러난 지 오래였다. 손목의 낡은 탐색기가 미약하게 깜빡였다. 목표 지점까지 아직 멀었다는 신호였다. 지도는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한 채 엉망진창으로 깨져 있었지만, 대략적인 방향은 알려주고 있었다. ‘구획 7-B. 중앙 데이터 저장소.’ 그 오래된 칩 하나에 모든 걸 걸고 있었다.
한때는 정보의 바다였을 곳. 지금은 죽은 도시의 심장부였다.
부서진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미래를…’, ‘…를 위한 기술’ 같은 조각난 문구들이 을씨년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진우는 건물 잔해를 조심스럽게 뛰어넘었다. 발밑에서 깨진 유리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그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도시의 가장 무서운 적은 목마름도, 굶주림도 아니었다. 바로 침묵 속에 도사린 ‘그들’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희미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순식간에 몸을 낮추고 뒤를 돌아봤다. 폐허 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나갈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또 시작인가.*
진우는 금속 막대를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망가진 건물들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빛은 오히려 그림자를 짙게 만들 뿐이었다. 그 그림자 속에서, 무엇이든 튀어나올 수 있었다.
다시 한번, 희미한 마찰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서.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었다. 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스크 너머로 탁한 공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시야는 제한적이었다.
“누구…!”
진우가 외치려던 순간, 그의 옆쪽, 부서진 철골 더미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재빠른 움직임. 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며 공격을 피했다. 쿵! 금속 막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철골을 때렸다. 그림자는 인간형이었지만, 그 움직임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마치 뼈와 기계가 뒤섞인 듯한, 기괴한 형상이었다.
“빌어먹을!”
진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림자와 거리를 벌렸다. 녀석의 눈은 붉은 점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청소부’라고 불리는 존재들. 도시를 망가뜨린 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자체적으로 진화한 듯한 반기계 생명체. 그들은 인간의 잔해를 먹고, 금속을 탐했으며, 살아있는 모든 것을 위협했다.
청소부는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우를 향해 돌진했다. 날카로운 금속 발톱이 새벽빛에 섬뜩하게 번뜩였다. 진우는 막대를 휘둘러 공격을 막았다. 쨍그랑!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충격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녀석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진우는 뒤로 물러서며 녀석의 움직임을 살폈다. 녀석의 몸체는 오래된 전선과 낡은 금속 조각들로 이루어진 듯했다. 마치 도시 그 자체가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녀석은 끈질겼다. 한 번 먹잇감으로 정하면 놓치지 않았다.
“꺼져!”
진우는 막대를 휘둘러 녀석의 약점을 노렸다. 목과 가슴의 연결 부위. 그곳에 약한 관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녀석이 재빨리 피하며 몸을 돌렸다. 진우는 잠시 휘청거렸다. 바로 그때, 녀석의 팔이 뻗어졌다. 날카로운 손톱이 진우의 방진복을 찢었다.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팔뚝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따뜻한 피가 방진복 안으로 스며들었다. *안 된다. 여기서 당할 순 없었다.*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녀석에게 덤벼들었다. 막대를 양손으로 쥐고 온몸의 체중을 실어 내리쳤다.
콰앙!
막대가 녀석의 머리를 강타했다. 전선 다발이 엉킨 듯한 녀석의 머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녀석은 잠시 휘청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우는 다시 한번 내리쳤다. 두 번, 세 번. 녀석의 몸체에서 금속 파편들이 떨어져 나갔다. 붉은 눈빛이 희미해졌다.
마침내, 청소부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희미하게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녀석의 찌그러진 잔해를 내려다봤다. 팔뚝에서는 피가 여전히 흘러나왔다.
“하… 하아… 젠장.”
진우는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벽에 기댔다. 마스크 너머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정도는 약과였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하나의 청소부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 주변에 더 많은 녀석들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피 냄새는 녀석들을 유인하기에 충분했다.
갈증과 통증, 그리고 주변을 옥죄어오는 위협. 진우는 서둘러 상처를 지혈해야 했다. 배낭을 열어 비상 약품을 꺼냈다. 투박한 소독약을 상처 부위에 부었다. 쓰라림에 이를 악물었다. 거즈로 상처를 단단히 감았다.
시간이 없었다. 그는 탐색기를 다시 확인했다. 목표 지점까지의 거리가 줄어들었지만, 주변의 위험 신호도 높아져 있었다. 붉은 점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진우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폐허 너머, 도시의 심장부를 향해 있었다. 그곳에 과연 희망이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뿐이었다.
그때, 저 멀리 도시의 가장 높은 첨탑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도시 전체를 감시하는 듯한 거대한 눈동자처럼. 진우는 숨을 멈췄다. 그것은 청소부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도시의 심연에 잠들어 있던 ‘감시자’인가.
진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위협이었다.
그는 무언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도시의 심장부는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혹은 죽지 못한 무언가의 영역이었다.
**”젠장…!”**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진우의 귓가에 닿았다. 그 소리는 마치 도시 자체가 내쉬는 숨결 같았다. 싸늘한 죽음의 숨결.
진우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섰다. 이제 막 다른 적을 처리한 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거대한 그림자는 지금까지 그가 상대해왔던 모든 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욱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
과연, 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