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뼈를 깎는 칼날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 차가웠다. 너무나 익숙한 냉기였다. 이곳은 늘 그랬다. 시간마저 얼어붙어 영원의 정지 상태에 갇힌 듯한, 기억의 심연.
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천장을 가로지르는 굵은 쇠사슬이었다. 녹이 슬어 검붉게 변색된 쇠사슬은 그의 기억 속 한 장면과 겹쳐졌다. 바로 자신이 매달려 있었던 그 쇠사슬.
“크… 윽…!”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다. 비명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지가 제멋대로 떨렸다. 뇌가 명확하게 인지하기도 전에,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저항은 헛될 뿐, 마치 생명체가 아닌 마른 나무토막처럼 삐걱거렸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살아 있었나?’
믿을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분명 죽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생생히 기억했다. 심장을 꿰뚫는 차가운 검날의 감촉, 폐부를 터져나갈 듯한 격통, 그리고…
“현…!”
이름이 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왔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그 순간, 어둠 속 억눌렸던 기억들이 폭풍처럼 몰려들었다.
검날은 차가웠다. 등 뒤에서 날아든 배신자의 검은 류진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피가 솟구치고, 힘줄이 끊어지는 고통이 온몸을 감쌌다. 전장에서 수없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끔찍한 고통이었다. 무엇보다 그 검을 쥐고 있던 이가…
[“류진, 미안하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눈동자에 서려 있던 광기. 입꼬리에 걸린 비틀린 미소. 친구라 믿었던 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십 년을 함께 전장을 누볐고, 서로의 등을 지켜주며 수많은 위기를 헤쳐 나왔던 나의 유일한 벗. 그가 나를 베었다. 온몸의 마나를 봉인하고, 육신을 쇠사슬에 묶어 이 망각의 심연에 던져 넣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날, 최전선에서 마왕의 잔당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던 중이었다. 류진은 피투성이가 된 채 마왕군의 심장부를 향해 돌진했고, 현은 그의 가장 든든한 방패이자 창이었다. 적들을 쓸어 넘기며 마침내 마왕의 심복을 눈앞에 두었을 때, 현은 돌연 검을 들어 류진의 심장을 꿰뚫었다.
[“너는 너무 강해.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살아있는 한, 나의 앞길을 가로막을 테지. 미안하다. 정말이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현의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했다. 마치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류진은 현의 검에 매달린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사방에서 동료들의 비명과 함께 검이 부딪히는 소리, 마법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어떤 것도 그의 귓속으로 온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현의 차가운 눈빛만이 선명했다.
그는 현의 검날에 매달린 채 버려졌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쇠사슬에 묶인 채 이곳, 영원히 잊힌 지하 감옥에 내던져졌다. 육신은 서서히 죽어갔고, 마나는 완전히 소멸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고통 속에 발버둥 치며 의식이 흐려지던 그 순간,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현… 네놈을…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수없이 반복한 맹세였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아니, 죽음 그 자체를 경험하며 류진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복수가 되었다. 몸속의 모든 피가 복수심으로 끓어올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 년? 몇십 년? 아니면 몇 세기?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시간의 개념조차 무의미한 곳이었다. 류진은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끝없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그의 육신은 서서히 부패하고 말라비틀어졌으나, 그의 의식은 소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그의 몸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자신의 피부를 만져보았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 마치 바싹 마른 나무껍질 같았다. 힘없이 들어 올린 팔은 뼈가 도드라져 보였고, 피부는 생기를 잃은 채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과거, 위대한 마나 기사단장이었던 자신의 건장하고 굳건한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떻게… 살아난 거지?’
궁금증은 사치였다.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그가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현을 향한 증오가 심장 깊숙이 박혀 있다는 것.
몸을 지탱하기 위해 겨우 팔을 뻗어 축축한 벽을 짚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차가운 돌의 감촉. 동시에 으스스한 한기가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어떤 기운이었다. 마나도, 정령력도 아닌, 낯설고 이질적인 기운.
류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감각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청각이 날카로워지고, 후각이 예민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동물의 울음소리,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생명의 기척.
그때였다. 어둠 저편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춤추듯 다가왔다. 빛의 근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동물의 눈이었다. 붉은색 섬광처럼 번뜩이는 두 개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류진을 응시했다.
*쉬이이익…*
동굴의 벽을 타고 기어오는 소리.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끈적한 체액을 흘리며 기어 다니는 육중한 몸통, 수십 개의 날카로운 다리, 그리고 흉측하게 벌어진 아가리. 고대의 저주받은 거미, ‘어둠비단 거미’였다. 이 망각의 심연에 주로 서식하며, 길 잃은 영혼이나 육신을 먹어치우는 끔찍한 괴물.
류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생존 본능, 그리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투 본능이었다.
어둠비단 거미가 거친 숨을 내쉬며 류진에게로 다가왔다. 촉수를 흔들며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류진의 현재 모습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죽음의 기운을 머금은 듯한 그의 모습이 괴물에게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흥…”
류진은 실소를 터뜨렸다. 비록 몸은 부서지고 말라비틀어졌지만, 그의 투지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렬해졌다. 어둠비단 거미 따위에게 죽을 수는 없었다. 현에게 복수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을 해칠 수 없었다.
어둠비단 거미가 거친 발굽 소리를 내며 류진에게 달려들었다. 수십 개의 다리가 돌바닥을 짓밟으며 류진을 향해 돌진했다. 끔찍한 독액을 머금은 송곳니가 번뜩였다.
류진은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힘을 끌어모았다. 과거의 마나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변화했다. 뼈 속 깊이 스며든 냉기, 마치 죽음의 기운 같은 이질적인 힘.
그는 어둠비단 거미가 충분히 가까이 오자, 온 힘을 다해 몸을 옆으로 던졌다.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미의 송곳니가 허공을 갈랐다.
류진은 바닥에 뒹굴며 팔을 휘둘렀다. 여전히 약하고 힘없는 움직임이었지만, 그의 의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손끝에서 스쳐 지나간 차가운 기운이 거미의 다리에 닿았다.
*쉬이이익!*
놀랍게도, 거미의 다리가 닿은 곳의 피부가 새까맣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독이 번지듯이,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기운이었다.
‘이것은… 흡수?’
류진은 자신의 변화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난 자신의 몸은 생명력을 흡수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 ‘망각의 심연’의 기운이 자신을 이렇게 변화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류진은 다시 한번 몸을 던져 거미의 몸통에 매달렸다. 거미는 기겁하며 몸을 비틀었다. 수십 개의 다리가 류진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휘둘러졌다. 하지만 류진은 끈질기게 매달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을 거미의 등껍질에 닿게 했다.
*키아아아악!*
어둠비단 거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몸집이 파르르 떨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류진의 손이 닿은 부위의 등껍질은 빠르게 썩어 들어갔다. 생명력이 빠르게 고갈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류진의 몸 안으로 흡수되는 듯했다.
흡수된 생명력은 류진의 마른 육신에 미미하나마 활력을 불어넣었다. 힘이 조금씩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어둠비단 거미는 결국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거대한 몸뚱이가 축 늘어지며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류진은 거미의 시체 위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비틀거림은 여전했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움직임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창백하고 말라있었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힘은 더욱 강렬해져 있었다.
“후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첫걸음이었다. 그의 갈 길은 멀고 험난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심장은 오직 하나의 목적으로만 뛰고 있었다.
복수.
현… 나의 친구이자 배신자여. 네가 나에게 선물한 이 망각의 심연에서, 나는 더 강해져 돌아갈 것이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네가 가장 아끼는 것을 부수고, 네놈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까지,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 류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 빛은 희망의 빛이 아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피로 물든 복수의 서막이었다. 그는 망각의 심연을 벗어나기 위한 첫 발걸음을 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