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새벽 공기가 닿는 도시의 아파트 숲, 그중에서도 가장 평범해 보이는 13층의 한 조각. 이지한은 늘 그랬듯 늦은 밤까지 모니터 불빛에 눈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그의 작업실은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했다. 널브러진 스케치북, 마르지 않은 물감 냄새, 그리고 오래된 나무 탁자 위에 놓인, 묘한 문양이 새겨진 작은 돌멩이 하나. 그것은 그가 과거의 흔적이라 부르는 것들 중 하나였다.

키보드 위를 떠돌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겨 새날의 초입을 알리고 있었다. 목덜미를 짓누르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지한은 길게 하품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잠들 줄 몰랐지만, 그의 방은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오히려 이따금씩 들리는 미약한 소리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부터였다. 분명히 제자리에 두었던 펜이 난데없이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컵이 혼자서 테이블 가장자리로 미끄러져 있는 일 같은 것들. 그는 그저 자신이 둔하거나, 집중력이 떨어졌다고 치부했다. 밤샘 작업이 길어지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지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물을 따랐다. 컵을 들고 돌아서려던 순간, 식탁 위 젓가락 통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똑바로 세워놓았다. 그러다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젓가락 통은 분명히 플라스틱 재질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서 있었다. 혹시 고양이를 키웠다면 모를까, 그의 아파트엔 그와 그의 그림자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깨를 으쓱하며 마시던 물을 마저 삼키고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그림을 마무리하고 내일 의뢰인에게 넘겨야 했다.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지만, 아까의 젓가락 통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다시 작업에 몰두하려던 찰나, 서재 쪽에서 작게 ‘틱’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서재는 그의 작업실과 침실을 제외한 유일한 방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는 그에게 서재는 말 그대로 책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환풍기 소리인가? 아니, 에어컨은 꺼져 있었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
그는 스툴에서 내려와 서재 문 쪽으로 걸어갔다. 희미하게 열려 있는 문틈으로 어둠이 비어져 나왔다. 전등 스위치를 켜자, 책장 가득 꽂힌 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네.”
안심하며 돌아서려던 그때, 책장 한가운데 꽂혀 있던 낡은 양장본 한 권이, 마치 누군가 뒤에서 밀어낸 것처럼, 천천히 앞으로 기울었다.
쿵, 소리를 내며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지한은 순간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냉기가 흘러내렸다.
그는 재빨리 책으로 다가갔다. 표지는 해지고 모서리는 닳아 너덜너덜했다. 고대 문자들로 가득 찬, 그 누구도 해석하지 못하는 언어로 쓰인 책. 그것은 그의 할아버지가 물려준 유품 중 하나였다. 지한은 떨리는 손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이게 왜 떨어져…”
책은 책장 깊숙이 박혀 있었다. 다른 책들에 눌려 빠져나올 수도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도, 마치 손가락으로 밀어낸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합리적인 설명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전기? 지진? 아니, 그 어떤 것도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지한은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고 서재 문을 닫았다. 작업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지만, 더 이상 작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몇 분이 흘렀을까.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쪽에서, 느릿하고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마치 누군가 낡은 나무 바닥 위를 맨발로 걷는 듯한 소리였다.
지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아파트 복도 바닥은 마루가 아닌, 대리석 타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혼자였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작업실 문 앞까지 다가온 듯했다. 그의 등 뒤에서, 숨결이 느껴질 것 같은 묘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공기가 한층 더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문틈 아래로, 어렴풋이 드리워진 그림자가 보였다.
너무나 길고, 너무나 얇은 그림자. 마치 손가락 마디마디가 뼈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손의 그림자 같았다.

지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거기 누구야!”
그의 외침에 그림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틈 아래의 그림자가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작업실 한가운데 놓인 낡은 나무 탁자. 그 위, 아까 그가 과거의 흔적이라 부르던 문양 새겨진 돌멩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새하얀 달빛을 받아 돌멩이는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아래로, 공중에 멈춰 선 돌멩이 주위를 감싸듯, 투명한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바람은 형체가 없었지만, 그 움직임은 마치 거대한 손이 돌멩이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것처럼 섬세하고 유려했다.

지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볐다. 그러나 광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중에서 빛나던 돌멩이가, 이내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스위치가 켜지듯 돌연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빛은 돌멩이에서 시작해 작업실의 벽면을 타고 번져나갔다. 벽지가 마치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흐물거렸다. 이내 벽의 표면이 일그러지더니,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현대 도시의 아파트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고대 문자들과 알 수 없는 상징들이 벽면을 뒤덮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선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거대한 에너지 회로도를 그려내는 듯했다. 그것은 그가 할아버지의 유품에서 보았던, 그러나 이해할 수 없었던 그림들과 정확히 일치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문양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그 중심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문자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혹은 잊으려 애썼던 고대의 힘이 깨어나는 신호처럼 보였다.
아파트의 평범한 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거대한 마법진이 차지했다.
지한은 두려움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벽면의 빛나는 문양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어둠이 응축되고, 그것이 마치 인간의 형상처럼 변모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눈동자, 뿔 달린 이마, 그리고 섬뜩하게 비웃는 듯한 입꼬리.
그것은 벽에서 솟아나온,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였다.

“돌아왔구나…”
웅웅거리는, 깊고 눅진한 목소리가 작업실을 가득 메웠다. 마치 오래된 지하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시공간을 초월한 목소리였다.
지한의 무릎이 꺾였다. 그의 심장은 이제 공포를 넘어선, 다른 종류의 감각으로 얼어붙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그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잊으려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이 아파트의 13층 작업실에서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현대 도시의 장막 아래 잠들어 있던 고대의 힘이, 평범한 한 남자의 삶을 비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밤, 이지한은 자신의 아파트가 더 이상 단순한 보금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곳은, 이제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1챕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