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기의 그림자
에스텔라 마법 학원, 고풍스러운 시계탑이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자 복도는 순식간에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명문 중의 명문, 전 세계 마법사들의 꿈이자 정점인 이 학원은 밤이 되면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왁자지껄했던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마법 주문 외우는 소리는 사라지고, 오직 오래된 석조 건물이 내뿜는 고독한 숨결만이 공기를 채웠다.
시아는 잔뜩 긴장한 채 망토를 여몄다. 제법 두꺼운 망토였지만, 엄숙한 대리석 복도를 따라 스며드는 한기는 뼛속까지 시린 듯했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양피지 지도가 들려 있었다. 지도라기보다는 낡은 스케치에 가까운 형태였는데, 희미한 잉크로 휘갈겨진 그림들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번져 있었다.
“리아, 너 진짜 괜찮겠어? 이거 들키면 최소 정학이야.”
시아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타고난 빛의 마법사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마력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시아 옆에 선 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살랑였다. “정학? 내가 널 따라가는 건데, 들키면 네 책임이지 내 책임이겠냐?”
“네가 먼저 가자고 했잖아!”
“어머, 그래? 네가 ‘으아아, 저 낡은 지도의 비밀을 풀고 싶어 죽겠어!’라고 외치며 내 기숙사 문을 발로 걷어찬 건 기억 안 나니?” 리아는 시치미를 뚝 떼며 시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냥, 그 도서관에서 발견한 지도가 너무 수상해서….”
이 모든 소동의 시작은 며칠 전이었다. 시아는 학원 도서관의 금서 보관 구역에서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우연히 발견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고서였다. 책 속에는 낡은 양피지 한 장이 끼워져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시아가 지금 들고 있는 이 의문의 지도였다. 지도는 학원 지하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고, 붉은색 잉크로 휘갈겨 쓴 “닿지 마라. 열지 마라. 잠든 자를 깨우지 마라.”라는 섬뜩한 경고문이 시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리아는 “흥미롭군.”이라며 지도를 대충 훑어보더니, 다음날 밤 바로 “탐험을 떠나자!”고 시아를 부추겼다. 리아는 위험한 일에 유독 신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쪽이었다.
“거기다가, 요즘 학원 지하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진다는 소문 못 들었어? 원장님도 밤마다 지하로 내려가는 것 같고.” 리아가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시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그냥 선배들이 지어낸 이야기 아니야? 지하실은 창고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잖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에스텔라 학원 지하에는 비밀 통로가 엄청 많대. 창고가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길들 말이야.”
둘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일반 학생들에게 개방되지 않는, 학원 가장 안쪽에 위치한 옛 서고의 지하실 통로를 향해서였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고,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다. 시아가 들고 있는 지도는 이 지하실 구석에 숨겨진 또 다른 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리 와, 시아. 여기에 뭔가 있어.” 리아가 어두운 구석을 손전등 마법으로 비추었다. 희미한 푸른빛이 좁은 통로를 밝히자, 오래된 나무 상자들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슬어 얼룩덜룩해진 철문에는 낡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고, 그 위로 희미하게 마법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진짜 문이라고?” 시아가 조심스럽게 문을 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문양에서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봉인 마법이었다.
리아는 들고 있던 지팡이, ‘바람의 속삭임’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마법의 빛으로 반짝였다. “이 정도 봉인 마법이라면… 내가 풀어볼 수 있겠는데?”
“잠깐, 리아! 위험할지도 몰라.” 시아가 말리려 했지만, 리아는 이미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유려한 바람의 마법이 손끝에서 피어올라 봉인 문양 주위를 감쌌다. 낡은 문이 낮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성공! 역시 난 천재라니까?” 리아가 의기양양하게 외치자,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안쪽에서 불어오는 공기는 눅눅하고 축축했으며,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으윽, 냄새가 너무 지독해.” 시아가 코를 막았다.
“걱정 마, 환기 마법 걸어줄게.” 리아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문 안쪽에서 희미하게 공기가 순환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냄새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문 너머는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듯한 어두운 계단이었다. 촛불 하나 없는 완벽한 암흑. 시아는 자신의 지팡이, ‘별빛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끝에서 영롱한 은빛이 피어올라 계단을 비추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낡은 돌계단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이 계단… 끝이 없잖아. 얼마나 깊이 내려가는 거야?” 시아가 불안하게 말했다.
“지도에는 ‘망각의 심연’이라고 적혀 있었어. 심연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건 아닐걸.” 리아는 오히려 더 신난 듯했다.
수십 계단을 내려갔을까, 계단은 갑자기 사라지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공간은 일반적인 방이 아니었다. 거대한 동굴과도 같았고, 중앙에는 정체 모를 검은 돌기둥들이 솟아 있었다. 돌기둥들은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지만, 묘하게도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는 기이한 ‘소리’가 있었다.
“시아, 너도 들려?” 리아가 잔뜩 굳은 얼굴로 속삭였다.
“응… 심장이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거대한 숨소리 같기도 해.” 시아는 별빛 지팡이를 꽉 쥐었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기척이 느껴지는 듯했다.
검은 돌기둥들 사이를 헤쳐나가자, 드디어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거대한 원형 공간이 있었고, 중앙에는 거대한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은 오래된 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는…
“세상에…” 시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제단 위에는 짙은 어둠으로 만들어진 듯한 액체가 담긴 거대한 그릇이 있었다. 그 액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그 안에서는 희미한 빛의 잔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마법의 파편들이, 빛의 조각들이, 그 검은 액체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귀를 찢을 듯한 ‘속삭임’.
*…굶주림… 배고픔… 갈증… 더… 더 많은 마력을…*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듯한 그 속삭임은 시아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마치 수백 년 동안 갇혀 있던 존재가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나 세상의 모든 마력을 집어삼키려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뭐야?” 리아의 목소리가 경직되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공포가 가득했다.
그때, 제단 중앙의 검은 액체에서 작은 기포가 솟아올랐다. 기포가 터지자, 그 안에서 아주 작은, 빛을 내는 구체가 튀어 올랐다. 그것은 마치… 마법 소녀의 마력이 담긴 핵심처럼 보였다. 그 작은 빛은 검은 액체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액체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그리고 액체는 더욱 깊고 짙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동시에, 제단에 새겨진 고대 문자들에서 섬뜩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번쩍이자, 시아와 리아는 자신들이 발을 딛고 선 곳이 단순한 동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곳은 살아있는 무언가, 아니,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시무시한 금기의 존재가 숨 쉬는 곳이었다.
*…깨어난다…*
시아의 등골을 타고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그녀의 별빛 지팡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본능적으로 외쳤다.
“리아, 도망쳐!”
하지만 이미 늦었다. 붉은빛이 제단 전체를 뒤덮으며, 거대한 굉음과 함께 봉인된 어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학원 지하 깊숙한 곳에서, 잊혔던 금기가 다시 한번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